5만달러를 투자하여 140만 달러의 효과를 얻은 마케팅 PR
과거 많은 기업 내부에서 마케팅 부서와 PR부서가 각자 따로 움직이며 그 둘 사이에 서로 조정 내지 협조하는 체재가 전연 가동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케팅 부서와 PR 부서는 서로 “라이벌(rival)”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 두 부서가 서로 잘 협조하면 상승효과(synergy)를 발휘할 수 있기에 PR이 마케팅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마케팅 PR(MPR)이 아주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다. 남태평양의 관광지 괌이 MPR기법을 동원하여 50,000달러의 적은 투자로 1,400,000 달러의 효과를 창출하여 데스티네이션 마케팅(Destination Marketing)에 성공한 MPR의 사례는 PR의 새로운 영역을 열 수 있다는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나는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외국 기업인로부터 시청률이 높은 프라임 시간대의 우리나라 TV광고가 너무 비싸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오후 8시30분에서 9시까지의 시간대'에 'KBS 제1TV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인기 드라마'는 사람으로 치면 골고루 갖춘 팔등신 미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에 접근도 해보지 않은 채 '그 프로그램은 우리가 파고들 틈이 없어'라고 단정하고 아예 접근을 포기해버린다. 과연 그런가?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몇 년 전 KBS의 인기 일일연속극 “당신이 그리워질 때”를 기억하는가.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까.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격언이다. 대다수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되면 그녀는 매우 아름답기 때문에 남자 친구가 분명히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한다. '그 아름다운 여자가 나의 애인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애인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외로 그 아름다운 여자에게 애인은커녕 남자 친구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을 수 있다.
수년 전 KBS 제1TV에서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방영되고 있던 '당신이 그리워질 때(Missing You)'라는 연속극의 프로듀서와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나의 대학 후배로 동문회와 관련된 학교내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났던 자리였다. 식사를 함께 하며 나는 "이 국장이 만들고 있는 프로그램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앞으로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될 지 궁금합니다." 그러자 후배는 드라마의 향후 스토리를 대략 설명하면서 "극중에서 젊은 주인공들이 곧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는데, ......" 이쯤에서 나는 육감적으로 후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주인공들이 떠날 예정인 신혼여행지를 괌으로 하면 어떨까요?" 그러자 그 후배는 "남태평양에 있는 낙원으로 알려진 섬 말이죠?"라고 관심을 보인다. 나는 내가 경영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가 1988년부터 괌정부 관광청의 PR 및 마케팅 업무를 맡아오고 있다고 제의의 배경을 설명하고, "주인공이 괌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면 최대한의 협조를 해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는 팔등신 미녀와의 데이트를 즐기면서 '괌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수행해 낼 수 있었다. 주역, 작가, 조명 등을 포함해서 40여 명의 KBS 제1TV 연속극 제작팀이 열흘간 괌을 방문하여 괌의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촬영한 장면이 매일 10분씩 1주일간 방영되었다. 비용면에서 괌 관광청은 노스웨스트 항공과 P.I.C.호텔이 그들의 PR을 위해 무료로 제공한(in-kind contribution)한 것들을 제외하고 교통비, 저녁한식당 비용 및 노래방 경비를 포함한 50,000 달러를 투자했다. 그리고 효과를 살펴보면 전체 방영시간을 30초 광고단가를 적용하여 계산했을 때 무려 1,400,000 달러의 광고를 한 셈이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괌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어 전화문의가 폭발적으로 쇄도했고, 괌을 찾는 관광객 수가 배로 증가했다.
괌 정부 관광청은 PR대행사인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를 통해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괌의 아름다움과 편리한 여행 편의시설을 알리자 했고, '당신이 그리워질 때'의 담당 프로듀서는 새롭고 신선한 해외여행지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제작하고 싶어했다. 서로가 필요를 충족해줄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중간역할을 함으로써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일로 해서 괌 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부터 표창장까지 받게 되었는데, 용감한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는 진리를 새삼 터득하는 기회였다.
이제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접어들었다. 효과적으로 당신의 회사나 제품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매체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우선 인기있는 TV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특성들을 분석해보라. 당신 회사의 앞선 기술력과 제품, 서비스나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이벤트가 어느 TV 프로그램에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지 찾아보라. 그리고 용기있게 그 프로그램의 담당기자나 프로듀서와 접촉하라. 의외로 쉽게 효과적인 PR을 할 수 있다.
흔히들 PR을 경비는 최소화하고 효과는 최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cost-effective)이라고 한다. 작은 투자로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PR에 좀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현명한 선택을 내릴 때이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당신 회사의 PR을 위해 기자나 프로듀서를 만나더라도 당신 회사에 일방적인 목적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되며, TV프로그램의 공익성 때문에 당신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알리기는 불가능하지만 공익성을 해치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시청자들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 가능할 때 MPR이 접목될 수 있는 것이다.
TV 뿐만 아니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대한 분석도 필요한 때이다.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는 구시대적인 매체로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에는 천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운행 중이며 차 안에서 다루기 쉬운 매체는 바로 라디오이다. 대개는 라디오를 청취하며 운전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기가 높은 라디오 프로그램은 인기있는 TV 프로그램의 수용자를 능가한다는 사실이다.
PR은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한 탐색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을 필요로 한다. 매사가 그렇지만 불가능한 듯 보이는 것이 오히려 너무도 쉽게 이루어질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해보겠다는 도전과 의지인 것이다. 이제 MPR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언론매체에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면서 폭발적인 마케팅 활성화를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MPR의 최고전문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담배의 매출을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신장 시킨 MPR의 천재 에드워드 버네이즈(Edward Bernays) 
1) 성공적인 안티 스위트 캠페인 (Anti-Sweets Campaign)으로 럭키 스트라이크의 매출을 3배로 신장
1928년에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담배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전쟁에 나가 있는 남성들을 대신하여 공장 등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서서히 담배 피우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2차대전후 아메리칸 토바코라는 담배 회사(ATC, American Tobacco Company)는 새로운 시장(여성고객)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당대의MPR의 대가 에드워드 버네이즈(Edward Bernays)를 채용하여 이 새로운 시장을 확장하기로 하였다. 버네이즈가 개입한후 첫 번째 PR프로그램으로 아메리칸 토바코는 여성고객 들에게 "담배가 식욕을 억제해 준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달콤한 디저트 대신에 럭키(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의 담배 브랜드 - 럭키 스트라이크를 지칭)를! “Reach for a Lucky Instead of a Sweet"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안티스위트(Anti-Sweets) PR캠페인을 시작했다. 당시 36세이던 버네이즈는 그때까지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의 컨설팅 자문료와 별도로 1년에 기본 고정금액 US$25,000의 수임료를 받고 있었으며 버네이즈의 본격적인 여성들의 담배시장 확장을 위한 안티스위트(Anti-Sweets) PR캠페인은 시작되었다.
버네이즈는 PR 캠페인의 첫번째 단계로 사진작가, 음악가, 화가, 예술가들을 이용하여 날씬한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그 중 한 방법으로 사진작가 친구 니콜라스 모리(Nickolas Muray)를 통해 "날씬함과 기품이 있는 여성들이 몸매관리를 위해 디저트를 대신해 흡연을 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여성들은 새로운 미를 상징한다고 생각하고 나는 이러한 나의 생각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고 싶다"란 의견을 받았고,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이와 같은 내용의 의견을 받은 후 그것을 관련기자들에게 자료로 보냈다. 이 내용을 토대로 언론 또한 담배를 피우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여성상에 대해 보도하였다. 물론, 버네이즈는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연기자, 운동선수, 댄서 등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잡지, 신문사들에게 보내어 여성의 날씬함이 하나의 새로운 미의 트랜드로 자리잡도록 했다. 그 결과 패션 편집인들은 아름답고 날씬한 파리 모델들의 사진을 화보에 담았고 통통한 여성보다는 날씬한 여성이 더 매력적이고 여성스럽다는 기사를 실었다.
두번째 단계로 버네이즈는 전문가를 이용하여 담배의 우수성과 역할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하고 시민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그는 영국의료인협회(British Association of Medical Officers of Health)의 조지 부칸 회장(Dr. George F. Buchan)을 통해 기자들에게 "달콤한 디저트는 치아를 썩게 하고 건강을 해친다. 식사를 건강하게 마무리하는 방법은 과일, 커피 그리고 담배"라고 설명하게 하였다. 부칸 회장은 기자들에게 "과일은 잇몸을 튼튼하게 하고 치아를 깨끗하게 하며, 커피는 입속에 침을 돌게 하여 구강 청정제 역할을 하고, 담배는 입안을 소독해주고 입안을 편안하게 만든다"라고 발표했다. 2000년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근거없는 언론발표였지만 그 당시의 언론들과 일반인들은 부칸의 발표이후 새로운 치아건강을 위해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버네이즈는 이러한 언론보도에 만족하지 않고 담배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 패턴이 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는 유명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담배가 하나의 디저트 메뉴로 오르게 하였고 유명 가정잡지인 "House and Garden"의 편집인에게 과식할 위험에서 구해줄 담배가 들어간 건강 식단, 디저트 메뉴를 디자인하게 하여 가정주부들에게 알리게 하였다.
또한 가정살림전문가들을 통해 부엌선반에 밀가루, 설탕 등과 같이 담배를 놓을 자리를 따로 마련하도록 하고 집에서의 담배는 설탕, 소금, 차, 커피와 함께 빠져서는 안 될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가정주부의 기본 필수품이라고 인식하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버네이즈의 노력에 의해 담배는 미국여성과 가정에서의 생활필수품이 되었고 안티 스위트 PR 캠페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버네이즈의 노력으로 럭키 스트라이크의 매출은 3배 이상 올랐고, 그 해의 순이익만 US$ 32,000,000이었다.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의 사장인 힐은 대단히 만족하였으며, 버네이즈는 성공한 PR의 대가로 두둑한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
1) 1920년 후반기에는 담배의 유해성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아 담배에 관한 PR프로그램은 아무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2) 고객도 놀란 버네이즈의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 캠페인
1929년 초 버네이즈의 안티스위트 캠페인에 힘입어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의 매출은 크게 늘었지만 힐사장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럭키 스트라이크 매출을 더 높이기 위해 버네이즈에게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마음껏 흡연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의뢰를 했다. 당시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한다는 것은 금기 시 되어 있었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버네이즈는 우선 힐에게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그의 삼촌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제자인 심리학박사 닥터 브릴(Dr. A.A. Brill)에게 여성흡연에 관하여 조언을 받도록 하였다.
닥터 브릴은 "여성들이 흡연을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시대가 바뀌어 감에 따라 남성들과 같이 일하는 여성들도 바꾸어가고 있다. 여성들의 출산이 줄어들고, 여성 본래의 여성스러움이 조금씩 없어지며, 남자들을 대표하던 담배가 여성들에게는 자유의 횃불로 변화해가고 있다."라는 조언을 했고 이 때, 버네이즈는 당시 미국의 가장 번화가였던, 5번가(Fifth Avenue)에서 자유를 상징하는 날인 부활절(Easter Sunday)에 한 여성이 당당하게 자유의 횃불(담배)을 들고, 여성의 담배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며, 시위를 하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바로 이 "자유의 횃불“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여성의 흡연할 권리를 찾는 캠페인을 실행에 옮겼다.
우선적으로, 버네이즈는 30여명의 뉴욕 사교계 및 패션계 인사들에게 그의 비서인 버다 헌트(Bertha Hunt)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와 젊은 여성들이 뉴욕 5번가에서 부활절에 자유의 횃불을 밝힐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여성들이 집, 레스토랑 등 실내에서만 담배를 피울 수 있고,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편견을 없애기 위해 여성 흡연자들과 그녀의 동지들은 5번가의 48번 거리에서 54번 거리까지 오전 11시 30분부터 1시까지 시위를 할 것 이라고 설명 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그 당시 유명 페미니스트 루스 헤일(Ruth Hale : New York World 컬럼니스트 Heywood Brown의 부인)이 사인한 광고가 뉴욕의 각 신문에 실려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버네이즈의 기획 아래 "자유의 횃불" 캠페인의 시나리오는 조심스럽고 상세하게 각본 되었다. 그는 이 여성들의 반란이 먼저 언론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고 그 후 여러 단체, 특히 언론들이 여성흡연에 대해 반박문을 실을 것이라 예상하고 각 매체에 대하여 모니터와 답변 준비를 지시하는 등 모든 것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준비하였다. 또한, 버네이즈는 록펠러 재단의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매주 일요일마다 다니는 유명한 성 패트릭(Thomas's, Saint Patrick's) 침례교회가 5번가에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그 교회를 지나갈 때, 예배를 보던 여성들도 같이 시위에 참여 하도록 계획을 만들었다. 시위에 참가할 여성들은 연애인 이나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이지만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을 주축으로 계획하였으며, 또한 언론들이 좋은 사진을 못 찍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전문사진사도 행사 때 섭외 해 놓았다.
드디어 1929년 3월 31일 부활절에 버다 헌트라는 한 매력적인 여성이 뉴욕의 가장 번화가인 5번가에서 럭키 스트라이크에 불을 피우며 행진을 시작했다. 그녀와 6명의 동지들은 "자유의 횃불"을 들고 여성의 인권, 여성의 흡연권을 주장하며, 록펠러가 예배를 드리는 5번가의 침례교회를 당당하게 걸었다. 물론 보도자료를 통해 이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 행사 내용을 전해들은 각 언론 기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고, 그녀와 시위에 동참한 여성들을 인터뷰하기에 바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자유의 횃불에 대한 아이디어는 내가 처음 길거리에서 흡연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남성이 저에게 와서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기 싫으니 담배를 꺼달라고 부탁했을 때였습니다. 저와 저희 친구들은 더 이상 여자라고 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시위를 하기로 계획 했습니다"라고 밝혔다. 물론 언론의 그 누구도 그녀가 버네이즈의 비서라는 사실은 몰랐다.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는 버네이즈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미국사회에 파문과 관심을 일으켰다. 미국 전 지역의 모든 신문, 방송들은 여성들의 자유를 부르짖는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를 보도했고, 보스톤,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등 각 지역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흡연을 하기 시작했다. 각 언론들은 길거리에서의 여성흡연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버다 헌터가 5번가에서 "자유의 횃불"을 지핀 몇 주후 미국의 브로드웨이 극장 남성전용 흡연실에서도 여성들의 입장을 허락하였다. 버네이즈의 "자유의 횃불" 캠페인은 표면적으로는 남녀평등과 여성의 자유를 상징했고 여성의 흡연이 늘어 감에 따라 여성용 담배로 포지셔닝한 럭키 스트라이크의 매출은 더더욱 들어났다. 버네이즈와 럭키 스트라이크의 캠페인은 또 한번의 성공을 거두웠으며, "자유의 횃불" 캠페인은 PR교재에서 성공적인 사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사례는 PR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학등 많은 학교에서 버네이즈의 "자유의 횃불" 캠페인에 대한 강의와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3) 녹색 무도회 캠페인(Green Ball Campaign) : 유행까지도 바꾸는 버네이즈의 마력
1934년, 버네이즈의 안티스위트캠페인과 자유의 횃불 캠페인 이후 여성의 흡연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하지만 앞에 두 캠페인에서 "럭키 스트라이크"라는 브랜드를 직접적으로 노출시키지 않았던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는 캠페인이 지난 몇 년 후 "럭키 스트라이크"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설문조사에서 여성들이 럭키 스트라이크의 녹색 담배 케이스가 여성들이 좋아하는 옷색깔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된 힐사장은 또 다시 버네이즈를 찾았다. 설문 조사 내용을 들은 버네이즈는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에게 럭키 스트라이크의 담배 케이스의 색을 바꾸지 않겠다면 패션의 유행색을 녹색으로 만들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프로그램 개발과 실행에 앞서 제일 먼저 버네이즈는 녹색을 분석하였다. 그 분석에서 녹색은 "희망, 소망, 승리, 풍부함을 상징했고 또한 평화와 고독함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 패션계에서 새로 출시된 옷들 중 20퍼센트가 녹색계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버네이즈의 분석결과 녹색을 유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패션계에 녹색과 관련하여 대대적인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당시 최고급 호텔이던 월도프 아스트리아(Waldorf Astoria)호텔에서 뉴욕 사교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녹색무도회(Green Ball)"를 열기로 하였다. 녹색 무도회의 주최로는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가 아닌 내셔널 시티 은행(National City Bank) 전회장의 부인이자 뉴욕 여성진료소(Women's Infirmary of New York)의 회장, 프랭크 밴더립 (Frank A. Vanderlip)에게 의뢰를 했다. 버네이즈는 그녀에게 무도회 수익금 전부는 불우가정 어린이들에게 우유, 옷 들을 기증하고, 심장병 환자와 여성 진료소 지원에 할 것이라 약속하였고 행사에 필요한 25,000달러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그의 고객이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버네이즈는 밴더립 여사를 통해 녹색무도회 이름처럼 녹색이 행사 테마였고 초청받은 모든 참석자는 녹색 드레스, 예복 의무적으로 입어야 한다는 초청장을 사교계의 저명 인사들에게 보냈다.
녹색을 유행으로 만들기 위해 버네이즈는 패션액세서리 업계들을 접촉하였다. 녹색무도회를 위해서는 녹색 드레스를 만드는 패션하우스도 필요하지만 녹색 드레스에 어울리는 녹색 장갑, 구두, 손수건, 헤어 악세서리, 모자, 그리고 보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논다가 실크회사(Onondaga Silk Company)의 사장인 필립 보글만(Philip Vogelman)에게 녹색무도회에 대해 소개와 앞으로 녹색이 새 유행 트랜드가 될 것이라고 귀뜸했다. 또한, 버네이즈는 필립 보글만에게 그의 회사가 이 새 유행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다고 전하고 그에게 녹색 가을패션 오찬(Green Fashion Fall Luncheon)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물론 그 오찬의 메뉴는 완두콩, 아스베라가스, 허브로 버무린 프랑스 양고기, 녹색빛 나는 민트 칵테일 등 모든 메뉴는 녹색테마의 음식이었다. 또한 헌터 컬리지(Hunter College) 미대 총장은 오찬 자리에서 "위대한 미술가들의 작품속의 녹색"에 대한 강연을 하였고 예술가들이 표현한 녹색의 심리학적인 측면을 소개하여 설명하였다. 다음날, "뉴욕 선 (New York Sun)"은 헤드라인 뉴스로 "녹색 겨울(It Looks Like a Green Winter)"이란 제목으로 올해는 녹색이 유행될 것을 예보하였다. "더 포스트 (The Post)" 또한 "녹색 가을"이란 제목으로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버네이즈는 녹색 유행을 위해 여성들의 옷 색상과 집 인테리어의 커튼색이 맞지 않을 고려하여 오논다가 실크 회사의 지원으로 버네이즈가 주도해 만든 칼라패션사무국(Color Fashion Bureau) 이름으로 각 인테리어 장식가, 미술협회, 여성클럽 들에게 새로운 유행이 될 색인 녹색에 대해 소개하는 편지들을 보내게 하였다. 칼라 패션 사무국은 5,000여 백화점과 상가매장 매니저들에게 새 유행인 녹색에 관련한 발표문을 보냈으며, 그 결과 77개 신문사, 95개 잡지사, 301개 백화점, 145개 여성클럽, 175개 라디오 방송국, 83개 가구점, 64명의 인테리어 장식가, 49명의 사진작가, 그 외 일러스레이터 등으로부터 의뢰가 쏟아 졌다.
뉴욕 5번가 디자이너 부티크들에서의 쇼 윈도에는 녹색 가운, 수트, 액세서리 등으로 장식되었고 유명 패션지 "보그(Vogue)"는 뉴욕의 녹색 드레스 트랜드에 관련한 스케치 기사를 실었다. 심지어 버네이즈의 활동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럭키 스트라이트"의 경쟁업체인 "카멜(Carmel)"은 그해 11월 광고에 럭키 스트라이크 케이스의 색인 녹색에 빨간 라이닝이 들어간 드레스 입은 여자들이 광고 모델로 나왔을 정도였다. 또한, 버네이즈의 시나리오 대로 "녹색무도회" 행사에 관련한 준비는 계획대로 성황리에 끝마쳤으며, 월도프 아스트리아 호텔에서의 "녹색무도회" 행사 또한, 보그의 평과 같이 인상적으로 끝이 났다. 보그는 "녹색무도회" 행사에 대해 "녹색무도회는 즐겁고, 발랄하면서 강렬한 이미지가 기억에 남을 만한 행사이며, 월도프 아스트리아 호텔의 녹색 조명 불빛과 아름다운 모델들의 녹색 드레스는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버네이즈조차도 녹색의 유행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하였다. 이번 녹색무도회 프로젝트에 대해 버네이즈는 그 해 모든 것이 녹색이었으며 또한 그 해 유행이 녹색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던 사실이라고 밝혔다. 힐은 버네이즈에게 또 한번의 막대한 보너스를 줌으로서 녹색의 성공을 평가했다.
버네이즈가 기획한 세기적인 이벤트 '빛의 금혼식'(Light's Golden Jubilee)
1929년 10월 토마스 에디슨의 백열등 발명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인 '빛의 금혼식'은 버네이즈의 대표적 성공 사례이자 PR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뛰어난 행사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사례는 버네이즈가 3백만달러를 쓴 행사의 공식후원자 포드(Ford)보다 자신을 고용한 전기회사 제너럴 일렉트릭( General Electric: GE)에 많은 이익이 돌아가도록 MPR적 측면에서 행사를 기획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행사를 맡았을 때 버네이즈는 매우 많은 클라이언트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의 판매 신장을 위한 여성 소비자 공략, 까르띠에(Cartier)를 위한 PPL(Product Placement) 시도, 다지(Dodge)사의 빅토리식스(Victory Six), 자동차․낙스(Knox)의 젤라틴․뉴저지벨(New Jersey Bell)의 새 전화 서비스 등 다양한 클라이언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일 그가 서술했듯 당시 많은 이들에게 PR 종사자들은 여전히 선정적이고 즉각적인 감짝쇼(stunt)를 하는 사람들로, 언론과 기업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존재 정도로 저평가되고 있었다. 그는 '빛의 금혼식'이야말로 PR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버네이즈는 에디슨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때는 미국증시 폭락 전으로 과학문명의 발달과 경제적 번영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믿는 낙관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행사의 후원자로는 GE와 포드자동차의 설립자 헨리 포드가 거론되었다. 결국 후원자로 에디슨을 흠모했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거부 헨리 포드가 결정되었다. 행사는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했고 GE 본부가 있는 뉴저지주 가 아닌 미시간주 디어본(Dearborn)에서 열리게 되었다. GE는 주후원자가 아니지만 행사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고, GE는 이 행사를 통해 자사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버네이즈를 고용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버네이즈가 행사 준비에 관계하게 되면서, 퍼블리시티 공세를 비롯한 PR캠페인이 즉각적으로 전개됐다. 기념행사 6개월 전부터 발명왕 에디슨과 백열등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후버 대통령이나 헨리 포드의 이름으로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언론들은 50년 전 일어났던 에디슨의 백열등 발명에 대해 수많은 기사들을 게재했고,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존 J. 퍼싱과 같은 유명인사들이 축하 서신을 보내왔다. 조지 M. 코핸은 '에디슨-기적의 인간(Edison-Miracle Man)'이라는 노래를 작곡했으며, 남극탐험가 리차드 버드 장군은 남극의 등대에 에디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국 전역은 곧 축하행사 열기로 들끓었고 각 도시는 에디슨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기획했다. 뉴햄프셔와 뉴멕시코 등 미국 각 주 뿐 아니라 캐나다와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도 전기의 발명을 기리는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체신국은 빛을 발하고 있는 에디슨의 램프를 그린 2센트짜리 빨간 우표를 발행했다.
한편 버네이즈는 행사에 앞서 GE의 본부가 있는 뉴저지주에서 '다이아몬드 축제(Diamond jubilee)'와 같은 빛의 금혼식(Golden jubilee)의 축소판 행사를 여러 차례 열어 GE측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빛의 금혼식: '빛이 있으라'
1929년10월21일 열렸던 행사에는허버트 후버 대통령, 퀴리부인, 록펠러 쥬니어, 비행기를 발명한 오빌 라이트, J.P 모건 등 당대 저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또 미국 주요 일간지와 통신사, 주간지, 사진기자 등이 초대됐다.
후버 대통령과 영부인은 이날 열린 퍼레이드에서 추운 날씨에도 컨버터블 자동차의 천장을 열고 디트로이트를 출발해 디어본에 도착했다. 이 퍼레이드에는 1백만명 이상이 운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헨리 포드가 에디슨을 기념하여 기부한 '그린필드 빌리지와 에디슨 회관' 개관식이 진행되었고, 정오쯤 본 행사가 시작됐다.
이날 저녁 헨리 포드가 미시간주에 옮겨 재건축한 에디슨의 뉴저지 실험실 이층에 82세의 에디슨이 나타나면서 행사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전 세계의 전기 회사들은 빛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일 분간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 칠흑같이 깜깜한 가운데 에디슨은 유명 인사들에 둘러싸여 본인이 50년 전 발명했던 전구를 앞에 두고 발명의 역사적 순간을 재연했다. NBC는 전세계 수백만 청취자들을 위해 "전구가 켜질까요? 아니면 타버릴까요?"라며 군중의 조바심을 자아냈다. "전구가 깜빡이다 꺼져버리지 않을까요? 실험실은 쥐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에디슨은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철사 두 개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제 그 전등으로 다가갑니다. 연결하고 있습니다. 전구가 켜졌습니다!".
이 전국 방송에서 아나운서는 "에디슨이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이어 전국에서 전등이 일제히 켜졌다. 천지창조를 본뜬 멘트로 전기가 대변하는20세기 과학문명의 유용성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버네이즈는 미시간에서 빛의 금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뉴저지주에 있는 에디슨의 실험실에서 미48개 주에서 초대된 영재 소년들이 묵으며 일주일간 에디슨과 코닥사 창립자 이스트맨, 포드 등 20세기 과학 문명의 창시자들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이 행사는 '빛의 금혼식'과 함께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다.
버네이즈는 PR캠페인의 성공을 위해 거부 헨리 포드의 지원하에 유명인사나 정부기관, 외국과의 협조를 얻어냈다. 버네이즈의 지시에 따라 전국에서 행사준비 위원회가 형성되었고, 행사일이 휴일로 지정되었으며, 전 세계의 전기가 꺼졌다가 켜졌다. 유명 인사의 연설이나 체신부의 특별 우표 발행 뒤에도 그가 있었다. 버네이즈는 기념우표 발행을 위해 체신부 장관을 만나 설득에 성공했다.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가였고 그만한 존경을 받아 마땅했지만 이 행사가 현실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PR인 버네이즈가 필요했던 것이다.
행사의 성공에 대한 찬사는 버네이즈에게 쏟아졌다. 내이션(Nation)지는 1929년 하버드 광고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우체국이 에디슨 전구 발명 5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하도록 만든 'PR인 버네이즈'라고 극찬했다. 한 신문은 빛의 금혼식에 대해 "대개는 후원자가 행사를 진두지휘하기 마련이지만, 이 행사의 무대를 만들고 저명 인사들을 움직인 것은 바로 이날을 위해 3백만 달러를 쓴 헨리 포드가 아니라 에드워드 버네이즈"라고 언급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자 레오나드 두브(Leonard Doob)는 '빛의 금혼식'중 버네이즈의 활약상에 대해 '전쟁이 아닌 평시에 이루어진 가장 눈부신 프로파겐다'라고 평가했다. 이중 에디슨의 백열등 발명 재연이 행사의 절정이었으며, 이는 GE로서는 최상의 MPR이 되었던 셈이다. 에디슨도 기념일 행사 후 버네이즈에게 직접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빛의 금혼식'-클라이언트(GE)와 MPR의 승리
'빛의 금혼식' 행사를 앞두고 언론은 버네이즈가 클라이언트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에디터앤퍼블리셔지(Editor and Publisher)지는 "버네이즈가 지난 봄부터 '빛의 금혼식' 행사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그를 고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가 나간 뒤 5일 후까지 언론은 버네이즈의 클라이언트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가 언론에 보낸 자료들은 전기나 전력 산업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포드 관련업체나 GE, 웨스팅하우스, 에디슨 램프 중 한 업체가 그를 고용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들 모두가 협조하여 버네이즈를 고용한 것일 수도 있다". 버네이즈는 사람들이 이 축하 행사가 GE 혹은 다른 업체에 의해 주도 면밀하게 기획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처럼 보여 극적 효과를 노리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어느 회사가 그의 고객인가를 묻는 질문에 "우리는 변호사나 의사와 마찬가지로 고객의 비밀을 보장한다"고 답해 언론의 궁금증을 부채질하면서 버네이즈 자신은 물론이고 주후원자로 선정되지 못했던 GE가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에디슨은 전기의 발명을 기념하는 이 행사가 상업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바 있었고 이는 GE가 아닌 포드가 주후원자로 선정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빛의 금혼식'은 그의 크고 전략적인 사고와 치밀한 실행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백열등의 발명을 기념하는 행사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클라이언트에게 최대의 이익을 가져오도록 했다. 행사 6개월 전부터 퍼블리시티 활용과 기념 우표 발행 등으로 빛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에 관심을 갖도록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으며, 에디슨이 백열등 발명을 재연하도록 하는 등 캠페인을 주도 면밀하게 기획했다. 행사가 뉴저지주 앞마당에서 미시간으로 옮겨졌음에도 자신의 고객이었던 GE에게 최대한 유리하도록 다이아몬드 축제와 영재 소년 초청 행사 등을 GE의 본사가 있는 뉴저지주에서 열기도 했다. 이 행사를 위해 포드는 3백만 달러를 지출했으나, 결과적으로 GE 등 전력공급 업체가 행사의 가장 큰 수혜자로 평가되는 것이다.
버네이즈는 인터뷰 중 '빛의 금혼식'을 본인이 이룬 '가장 큰 승리'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언론은 이 화려한 국제적인 미디어 행사를 기획, 실행한 데 대해 버네이즈에게 찬사를 보냈으며, 이 행사는 PR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전략적 접근과 치밀한 실행을 통해 고객들에게 최대의 수확을 가져다 주는 동시에 자신의 업인 PR의 승리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아이보리 비누와 버네이즈의 새로운 수요창출 MPR
에드워드 버네이즈가 생애 30여년간 P&G에 제공했던 PR 서비스는 여러 면에서 현대 MPR의 교과서적인 의미가 있다. 버네이즈는 제품 퍼블리시티는 물론이고 다국적 캠페인, 커뮤니티 관계(community relations), 위기 관리(crisis management), 공중 관계 (public affairs), 미디어 캠페인 등의 다양한 PR 방식을 활용하여 P&G의 시장 내 위치를 끌어 올렸다. 버네이즈의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20년에서 1950년대까지 P&G는 버네이즈의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 였다.
P&G는 1837년에 양초 제작자인 윌리엄 프록터와 비누 제작자 제임스 갬블이라는 사람들이 합작으로 만든 회사로, 1860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에 비누와 양초를 납품하며 크게 성장했다. 1870년대 토마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함으로 양초의 수요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P&G는 자연스럽게 비누 생산 쪽으로 사업의 비중을 옮겼다.
1879년에는 P&G의 한 직원이 우연히 물에 뜨는 아이보리 비누를 발명하게 되었다. P&G는 당시 기존의 비누보다 훨씬 순하고 부드러운 아이보리 비누를 "순수함(Pure)" 라는 컨셉으로 포지셔닝 하며, 우아한 여성, 어린아기, 성직자 등을 모델로 삼아 적극적인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적극적인 캠페인 덕에 1890년대 P&G는 30여종이 넘는 미국 최대의 비누 생산업체가 되었다.
1923년 P&G는 당시 최고의 PR 컨설턴트인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고용하여 아이보리 비누 캠페인 확대를 의뢰했다. 버네이즈는 PR을 실행하기 전 먼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무색, 무향의 순한 비누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당시 시중에서는 아이보리가 유일한 무향의 비누였기 때문에, 버네이즈는 이 설문조사 결과를 언론에 배포해 보도되도록 유도함으로 간단하게 판매 증진의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이보리 캠페인의 모델 겸 타켓층이었던 어린이들은 비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히려 비누 때문에 눈이 따갑다고 불평했으며, 그 당시 아이들은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샤워를 하는 실정이었다. P&G는 비누에 대한 이러한 아이들의 태도 자체를 개선시키고 싶어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닌, 매일 샤워하는 유행을 만들고 싶어했다.
이 문제에 대한 버네이즈의 해결책은 간단 명료하고 효과적이었다 "비누의 적인 아이들이 아이보리 비누 사용을 좋아하게 만들자!(Children, the enemies of soap, would be conditioned to enjoy using Ivory)"는 것이었다.
1924년 버네이즈는 전국비누조각대회 (National Soap Sculpture Contest)를 조직했으며, 큰 상금을 내걸어 공중의 관심뿐만 아니라 언론의 주목을 이끌었다. 첫 대회에는 일반 조각가, 건축가 및 기타 예술인들이 참가하여 450kg가 넘는 대형 아이보리 비누를 멋지게 조각했으며, 이듬해부터는 이 대회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 국민적인 행사로 발전시켰다.
버네이즈는 일년에 한 번 개최되는 대회 뿐만 아니라 평소 학급의 미술시간에도 비누를 조각 하게끔 유도했다. 1961년까지 37년 동안 계속된 이 전국비누조각 대회는 매년 수 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서로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겨루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회 수상작들은 뉴욕 및 전국의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미국 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언론 홍보 효과를 창출해 냈다.
아이보리를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버네이즈는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아이보리 비누로 만든 요트 띄우기 대회를 창안해 다시 한번 다른 각도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전국가정부(National Household Service)의 이름을 빌어 각 가정에서 아이보리 비누 사용을 권장하는 내용의 책자 '생활의 지혜'를 만들어 배포 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이보리 비누의 판매를 촉진했다. 또한 버네이즈는 각 지방의 상징물, 동상 및 공공 건물들을 아이보리 비누로 깨끗하게 세척하는 활동을 벌이며 각 지방의 '순수한 긍지 (Pure Pride)'를 강조했다.
1930년대 P&G의 한 PR 임원은 "버네이즈의 아이디어는 개념적(conceptual)이고, 독창적이었으며, 마치 마술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공식은 간단했다. 버네이즈는 이벤트를 만들었고, 이벤트는 뉴스를 만들었고, 뉴스는 제품 혹은 서비스의 판매증진 및 이미지 제고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버네이즈는 퍼블리시티에의 새롭고 발전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했다. 그는 경쟁사의 시장점유율을 뺏어 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들었던 것이다.
버네이즈가 베이컨과 계란을 모든 미국인들의 아침식사로 만들었던 것처럼 아이보리를 모든 미국인들의 비누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클라이언트를 위해 매체를 이용하였고 여론을 유리하게 형성시켰으며 공중과 언론매체의 이목을 끄는 많은 이벤트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는 제품 판매를 위해 간접적인 PR방식으로 마케팅을 지원했다. 버네이즈는 이미 그 당시에 현대적 의미의 MPR 전략을 개발 활용했던 것이다.
당신도 마케팅 PR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동안 PR은 마케팅 활동의 부수적인 수단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미 선진기업들은 PR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제품 이미지 형성과 촉진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실제 MPR은 광고보다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외국의 경우 포드사는 신제품 토러스(Taurus)와 세이블(Sable)을 개발한 후 시판 전까지 PR전략만으로 상표인지도를 50% 이상 확보했으며 14만 6천 명과 계약을 맺었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ET가 리시스 피시스(Reese's Pieces) 캔디가 깔린 길을 따라가는 장면이 상영된 후 캔디 판매가 65% 증가했다. 러시아에서 맥도널드 햄버거가 문을 열었을 때 언론보도에 힘입어 첫날에만 3만 명이 찾아드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언론이나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MPR전술을 토마스 해리스(Thomas L. Harris)의 ‘The Marketer's Guide to Public Relations'에 소개된 주요 MPR의 도구들을 살펴본다.
(이도구의 영문 첫단어가 A에서 Z까지 있으나 중요한 몇가지만 언급한다.)
(1) 수상(Award)
유명인을 상징적 인물로 선정하고 이를 수상함으로써 제품을 마케팅하는 방법이다. 립케어(Lipcare) 제품업체인 블리스텍(Blistex)는 ‘가장 아름다운 입술 콘테스트’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 콘테스트는 블리스텍스의 립케어 전문가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입술을 가진 12인을 선정하는 것으로, 세계적인 스타나 스포트맨 또는 경영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전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2) 책자발간(Book)
제품과 관련된 책자를 발간하면 판매를 증진시킬 수 있다. 주방기구 업체에서는 요리책을 펴낼 수 있으며 세탁기 업체는 세탁백과를, 컴퓨터 업체에서는 인터넷 활용서를 출간할 수 있다.
(3) 콘테스트(Contest)
콘테스트와 공모전을 실시하면 큰 판촉효과를 노릴 수 있다. CAD/CAM 소프트웨어 공급업체인 P&G는 자사의 비누제품을 마케팅하기 위해 ‘샤워 노래부르기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행사는 매년 1,000명의 관람객을 동원하고 있으며 매체의 관심을 집중시켜 1억 6천만 명의 고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조사됐다.
(4) 시연(Demonstration)
고객에게 제품을 직접 작동해 보이거나 경험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즉각적인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상가나 쇼핑몰 또는 호텔의 연회장에 고객을 초대해서 하는데, 제품의 구애받지 않고 널리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5) 전문가칼럼(Expert Column)
신문을 보면 수많은 전문가 칼럼이 있다. 외부 전문가나 기업 내부의 대변인이 독자의 질문에 답해 주거나 도움이 되는 지식을 나누어주는 난이다. 존 디어(John Deere Company)의 칼럼 ‘Deere John'을 예로 들 수 있다.
(6) 페스티벌(Festival)
MPR전술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방법으로 미국에서는 후원사 유치를 위한 페스티벌 디렉토리까지 발간되고 있다. 일부 기업은 후원사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개최하기도 하는데, 그 좋은 예가 허쉬식품의 ‘그레이트 어메리칸 초콜릿 페스티벌(Great American Chocolate Festival)'이다.
(7) 순회전시회(Road Show)
제너럴 모터스(G.M.)의 로저 스미스 회장은 GM을 자동차분야의 기술 선두업체로 재포지션닝하고 고객의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MPR캠페인을 실시했다. 뉴욕에서 시작되어 각 도시를 순회하는 전시회(Road Show)인 이 캠페인은 즉시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수천 명의 참석자에게 GM의 성공과 제품, 기술력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었다.
(8) 탐방(Junket)
공장이나 연구소 혹은 교육시설 탐방은 언론에 기사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자연농원은 희귀동물 팬더 도입에 따른 입장객 증대방안이 필요했다. 우선 국내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신문과 방송기자를 중국으로 동반해 쓰촨성 팬더 번식단지와 팬
더 인수광경을 취재하게 했다. 이는 중앙일간지와 방송에만 100여 건의 기사와 뉴스로 다루어졌다.
(9) 언론매체의 기업방문(Tour)
매체의 신뢰도와 파급효과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특히 TV매체의 기업방문은 광범위한 소비자층에 제품을 소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다.
(10) 이슈만들기(Key Issue)
기업이 소비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이슈를 제기하면 자연스럽게 기업과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 실제로 제약회사는 국민의 건강을, 화장품 회사는 건강한 피부를, 그리고 티슈회사는 나무심기를 이슈화하고 있다.
(11) 공인(Official Endorsement)
정부나 관련기관의 공인은 제품의 시장입지를 강화해준다. 크레스트 치약에 대한 미국치아협회의 추천은 해당 브랜드를 우수 상품으로 승격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기업에 대한 시장이나 장과, 대통령의 언급은 정보원천의 신뢰성(Source Credibility)을 높여 기업이미지를 높여줄 수 있다.
(12) 팬클럽(Fan Club)
연예계의 한 영역이었던 팬클럽은 이제 모든 제품에 활용되는 MPR 요소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회원에게는 회원카드와 증명서, 제품, 뉴스레터, 소개책자 등이 제공되며, 정기 모임을 통해 회원의 놓은 관심과 급속한 구전효과(Word-Of-Mouth)를 얻을 수 있다.
(13) 서명운동(Underwriting)
전문적이고 호응률이 놓은 스포츠분야의 서명운동에서 기금후원자나 예술공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서명운동은 마케팅 관리자들이 대상 소비자의 관심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훌륭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14) 박물관 건립(Museum)
기업이 세운 박물관은 오래도록 관광객의 인기를 끌며 PR 효과를 낼 수 있다. 코카콜라는 애틀란타에 코카콜라 월드라는 박물관을 개관했다. 뉴욕타임즈는 기업에 소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 우해 마케팅과 교육, 오락을 효과적으로 융합해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언급했다.
(15) 공익사업(Public Service Announcement)
공익사업은 기업이 공익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실천함으로써 기업이미지를 놓이고 궁극적으로 매출증대를 꾀할 수 있는 방법이다. 경쟁은 심화되는 데 비해 제품의 차별화 요소가 매출증가에 위협을 받게 된 유한킴벌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으로 나무심기 운동을 실현하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을 실시하여 소비자의 우호적인 태도를 획득할 수 있었다.
MPR 아이디어 하나로 돈방석에 오르다
1983년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을 전후하여 미국을 강타한 양배추인형 붐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양배추 인형을 개발한 콜레코(Coleco Co.)사는 주어진 마케팅 예산으로는 효과적인 TV광고가 불가능하여 PR전문대행사인 리처드 와이너사에 의뢰하여 MPR기법을 동원하여 승부를 걸기로 했다.
콜레코사의 양배추인형은 포근했고, 품 안에 쏙 들어왔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특했다. 이 사랑스러운(또는 보는 이에 따라 징그러울 수도 있는) 양배추 인형은 미 조지아 주의 한 조각가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콜레코(Coleco Co.)사는 양배추 인형의 마케팅을 위해 MPR에 거의 대부분을 투자했는데, 그 첫 단계로 PR 컨설팅 회사인 리차드 와이너(Richard Wiener Inc.)를 고용했다. 와이너사는 우선 심리학자를 고용해서 이 인형의 어떤 점이 아이들에게 어필했는지 조사했다. 밝혀진 사실들 중 하나는 인형의 신체적 형태가 아이들의 아기 돌보는 본능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인형을 돌본다는 컨셉이 양배추 인형의 특성과 잘 맞아 떨어졌다. 이 조사 결과에 대한 포지션 페이퍼가 작성되어 양배추 인형 프레스 킷과 함께 매체에 배포되었다. 그에 더하여 “양배추 인형 돌보는 법”에 간한 지침서가 인형과 함께 포장되어 판매됐다.
이 조사결과에 바탕을 둔 PR 계획이 다음과 같이 실행되었다.
* 1983년 10월에 양배추 인형 홍보 사절단이 미국의 15개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각종 TV와 라디오의 뉴스 및 토크쇼에 출연하여 널리 알렸다.
* 보스톤에서 대대적인 양배추 인형 행사가 진행됐으며, 초청된 아이들은 무료로 인형을 받았다.
* 양배추 인형 프레스 킷이 전국의 주요 언론매체에 배포되었다. 신기술에 관심 있는 매체 특성을 고려하여, 프레스 킷에 매 분마다 인형 얼굴을 변경시켜 똑같은 표정의 인형이 없게 만드는 컴퓨터로 작동되는 생산장비를 부각시켰다.
* 통신사들에게 양배추인형이 전국적으로 동이 날것을 알렸다.
* 많은 물량을 각종 자선단체와 병원에 선물로 배포한 끝에 마침내 와이너사는 당시의 영부인 낸시 레이건(Nancy Reagan) 여사로 하여금 미국에 심장병 수술을 받으러 왔던 두 한국인 어린이들에게 양배추 인형을 선물하도록 마련했다.
양배추인형은 대단한 성공을 거듭했으며, 콜레코사는 짧은 시간에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마케팅 환경이 열리고 있다. 광고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마케팅 활동이 이제 그 위력을 잃어가오 있다. 이제 광고만으로는 다양하고 복잡한 환경에서 세분화되는 공중을 설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 마케팅 관리자는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롭고 비용 효과적인 마케팅 방법을 발굴해야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마케팅PR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한다.
인터넷을 통해 다시 살아난 리바이스 청바지
지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자상거래(e-commerce)라는 말은 미국에서도 낯선 단어 중 하나였다. 지금은 일반화 된 '커뮤니티'라는 의미도 당시는 이웃이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정도로서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스앤노블 같이 대형 서적 판매 회사가 점차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업체들에게 도전을 받고 있던 당시만 해도, 주요 소비재 회사들은 선뜻 온라인 사업에 나서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조금만 두고 보자 하는 생각으로 누가 먼저 나서 온라인의 힘을 한번 검증해 주었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청바지 리바이스는 90년대 후반 언론으로부터 이미 "한물간" 브랜드로 취급 받고 있었다. 최대 고객층인 10대들도 리바이스를 '고리타분'해 했다. 역사를 자랑하며 노후된 이미지의 리바이스에게는 10대들을 열광하게 할 그 무엇이 절실히 필요했고, 그 도구는 곧 인터넷이었다.
리바이스 청바지 회사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세계적인 PR 회사인 켓첨과 야심찬 온라인 이벤트를 계획했다. 10대들 중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당시 전자상거래는 초기 상태인데 비해 대학생들의 인터넷 사용시간은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그들의 온라인 구매 경험 또한 약간씩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이러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리바이스 온라인 챌린지'라는 이벤트를 발표했다. 이 이벤트는 인터넷과 전자상거래에 익숙한 대학생 3명을 선발해 한학기 약 20주동안 리바이스 스트라우스측에서 용돈을 제공하고, 그 용돈으로 인터넷상에서 온라인 구매를 통해 모든 생활을 해결 하는 서바이벌류의 MPR 이벤트였다. 단 그들은 이 이벤트에 참가하면서 가끔 리바이스의 제품들을 구입하고 평가 해야 했다.
각종 언론에서는 "어떻게 사람이 온라인에서 생활을 할 수 있을까?'하면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여세를 몰아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전국적으로 대학이 군집해있는 29개 도시를 대상으로 리바이스의 온라인 이벤트에 참여할 대학생을 모집했다. 모집 개시 일주일 만에 약 500여명의 대학생들이 지원을 했다.
지원자들의 인터넷 활용 능력과 전자상거래 경험 등을 다방면으로 심사한 후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3명의 대학생을 이벤트 참가자로 선정했다. 이들은 선발 직후부터 전국 언론 매체의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언론사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리바이스 스트라우스의 본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벤트 참가를 위한 3일간의 특별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리바이스 온라인 챌린지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이들은 자신이 생활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온라인으로만 구입하면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의 온라인 스토어 사이트인 Levi.com내에는 이들 세 명의 홈페이지가 만들어졌고, 각각의 홈페이지에 그들이 구입한 물건들과 매일매일의 일기 그리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속속 게시되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3명의 대학생들이 사이버상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수많은 팬들이 프로그램 참가 대학생들 각자의 홈페이지에 접속 하기 시작했고, 3명의 대학생들이 온라인 구매를 통해 소비하는 제품들을 따라 구매하기 시작했다. 또한 팬들의 관심사는 '과연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승자가 될 것인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쯤 되어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아예 일주일에 한번씩 이 3명 대학생들의 일상생활을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온라인 방송을 시작했다. 20주동안 매주 한번 Levi.com 사이트를 통해 3명의 대학생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사이트 방문자들과 팬들의 대화방을 운영했다. 그들이 온라인상에서 구하지 못한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는 사이트 정보를 제공하는 팬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프로그램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Levi.com에 접속하는 방문자 1인 당 1달러씩을 에이즈 퇴치기금으로 조성하여 관련 모임에 기부하는 자선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다시 한번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본 프로그램을 주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로서 '한물간' 브랜드였던 리바이스는 10대들이 열광하는 브랜드로 다시 자리잡게 되었다. 온라인 이벤트를 시행하기 전 Levi.com의 하루 방문객 수는 3천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벤트 실시 후에는 매일 13만 명의 10대들이 사이트를 들락거리게 되었다. 20주간의 이벤트 기간동안 Levi.com 사이트에는 총 1억 명 이상의 방문객 수를 기록했다.
또한 오프라인상에서도 CNN, USA Today, The New York Times, The Wall Street Journal 인터넷 판, Women's Wear Daily, Investor's Business Daily, The Industry Standard, Promo Magazine, Forbes Magazine, MSNBC.com 등과 40 여 개 이상의 방송사들과 신문 및 라디오들이 트렌드 기사로 리바이스 온라인 챌린지 이벤트를 크게 다루었다.
이후 이 프로그램은 MSN이나 USA 투데이 같은 '젊은 고객'을 지향하는 회사들에 의해 재현되기도 했을 정도로 성공한 MPR 프로그램이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이 도입되어 초기 전자상거래 시장에 관한 붐을 조성하기도 했다. 


예쁜 바비(Barbie)에서 여성 바비로의 변신
1959년에 처음 소개된 예쁜 인형의 대명사 바비 (Barbie) 인형은 1999년 탄생 40주년 기념행사를 가지면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인형을 만드는 회사 마텔(Mattel)은 항상 바비 인형에 쏠려있는 일부 사람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신경 쓰여 했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끊임없는 바비 신화를 이어가기 위해 마텔은 이러한 바비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해야 했다. 그 때 마침 바비 탄생 40주년을 맞게 되었고 마텔은 이 기회를 맞아 기존 바비의 이미지를 새로운 이미지로 다시 포지셔닝하는 MPR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먼저 마텔은 500여명의 여성들과 3~11세 연령층의 딸을 가진 엄마들을 대상으로 전화 조사를 실시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바비에 대한 이미지는 "풍만하다" "운동을 해서 날씬하다" "독립적이다"등과 같이 비교적 긍정적인 이미지였다. 다만 그들은 바비가 이러한 이미지에 더해 "지적이고" "목표지향적'이며 "다정다감한' 느낌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바비 인형을 가지고 노는 자신의 딸들이 하나의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는 보다 완벽하고 훌륭한 여성상을 바비에게 원했던 것이다.
또 한가지 마텔이 놀란 것은 바비 브랜드가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자선활동들을 조사대상인 여성들이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텔은 언론매체를 대상으로도 별도의 미디어 오딧을 실시했다. 기자들은 바비에 대해 직접적 소비자인 여성들보다 약간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성의 성적 매력만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 "의존적이고 나약한 여성상의 상징이다" "차갑고 쌀쌀 맞은 느낌이다"등의 의견이 많았다. 그들 또한 기존에 시행중인 바비 브랜드의 자선 및 사회 공헌 활동들에 대해서는 깊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텔은 '바비' PR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여성들의 사회적 성공과 비전의 실현을 지원하고 있는 다양한 조직들도 조사했다. 미국 걸스카웃 협회, 걸스 인코포레이티드 (Girls Incorporated), 걸스 파워(Girls Power)등과 같은 여성 조직들이 바비의 이미지 재 포지셔닝 프로그램에 관심을 나타내는 곳들이었다.
마텔은 바비 탄생 40주년을 맞아 바비가 '소녀들의 꿈을 키워주는 가치를 제공한다'는 이미지를 특별히 부각시키는 야심찬 MPR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바비 이미지인 "예쁘기만 한 수동적, 의존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목표지향적이며 지적이고 다정다감한' 바비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바비가 제공하는 핵심메시지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Be Anything)"로 소녀들에게 미래에 대한 용기를 심어주는 의미였다. 목표공중으로는 여성 전체로 현재 또는 미래에 엄마가 될 모든 여성이 주요 대상이었고 물론 언론 매체들도 포함되었다.
먼저 마텔은 당시 소녀들에게 "강하고, 현명하며, 용감하라"는 메시지를 제공하면서 활발하게 여성운동을 실행하고 있는 조직인 걸스(Girls. Inc)와 전략적인 제휴를 맺었다. 이 조직과 마텔은 10명의 유명 여성으로 구성된 '꿈의 바비 대사(Barbie Ambassadors of Dreams)'들을 조직했다. 이 대사들은 로시 오도넬과 같은 유명 여성 앵커로부터 과학자인 카트리나 가넷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맹렬 여성들이었다.
1999년 1월 1일 마텔의 CEO인 질 바라드는 1999년 한해를 바비 브랜드 테마의 해로 정했다. 뉴욕 장난감 박람회에서 마텔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Be Anything)"는 바비의 새로운 브랜드 테마를 발표하면서 걸스(Girls. Inc)에게 여성 교육 활동을 위해 사용하라며 150만불을 기부했다. 또한 '꿈의 바비 대사들'로 뽑힌 유명 인사들을 발표하여 바비를 소녀들의 미래를 가꾸어 줄 수 있는 가치를 제공하는 인형으로서 포지셔닝했다. 행사의 프레스킷에서 마텔은 바비가 여성의 사회적인 역할을 대변하고 있다는 취지로 당시까지 40년간 바비 인형이 대표 했었던 약 75종의 다양한 직업군들을 보여주었다.
바비의 실제 탄생일인 3월 9일 마텔은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대형 생일 파티를 개최했다. 바비의 이미지를 비즈니스적 성공과 연계 시키는 전략이었다. 마텔은 월스트리트를 하루동안 '핑크' 빛으로 물들였다. 거리 도로와 벽에 분홍색 커튼과 카펫으로 도배를 했던 것이다.
증시 장의 개장과 폐장을 알리는 벨 데스크에 분홍색 생일 축하 케익을 올려 놓았다. 개장 버튼을 누르기 위해 바비 인형의 창시자인 당시 84세의 루스 핸들러 여사가 단상에 올랐다. 개장 버튼을 누른 후 핸들러 여사는 분홍 케익 위에 켜진 40개의 촛불을 불어 껐다.
마텔은 뉴욕증권거래소 행사를 마친 후 바로 걸스 (Girls. Inc)와 함께 "파워 브랙퍼스트" 이벤트를 시작했다. 약 30여명의 비즈니스 우먼들을 초청해 아침식사와 함께 이벤트에 참여한 소녀들과 여성들에게 예산 구성 방법, 재무 상식 및 비즈니스 커리어 관리등과 같은 교육을 실시했다.
이날 오후에는 루스 핸들러 여사가 뉴욕의 초대형 완구 배장인 FAO 슈워츠에서 생일 축하 케익의 촛불을 끄는 행사가 있었다. 바비의 살아있는 어머니로 불리는 핸들러 여사는 약 800여개의 수집용 바비인형에 직접 서명을 해 바비 팬들에게 선물했다.
마텔은 1999년 일년 내내 걸스(Girls, Inc)와 함께 꿈의 바비 대사들에 대한 언론홍보와 더 나아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교육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실시 해 나갔다. 또한 "일하는 여성 바비' 인형을 제작 판매하기도 했다.
마텔은 이러한 일련의 MPR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완벽한 실행을 위해 마텔의 모든 임원들을 대상으로 언론훈련을 실행했다. 또한 루스 핸들러 여사를 세계에서 가장 큰 완구 제조사인 마텔을 창시한 인물로 적극 노출 시켜 메시지 전달에 활용했다.
마텔은 1999년 내낸 여러 여성 단체들과 소녀들의 엄마들로부터 수많은 감사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들은 거의 모두 "바비가 소녀들과 여성들을 위해 보여준 비전에 동감하고 마텔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약 70%의 언론 매체들이 바비 MPR 프로그램의 핵심 메시지들을 정확하게 전달했으며, 약 50%의 언론매체들로부터 '바비가 소녀들에게 영감을 주는 모델'로 치하 받았다.
바비의 이 프로그램은 미국 외에도 총 25개 국가에서 기사화 되었다. The Wall Street Journal, New York Times, USA Today, The Hollywood Reporter 등과 CNN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199년 1년간 약 1700여 개의 바비 관련 기사들이 다양한 매체들에서 게재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하나의 제품을 문화적인 상징으로 포지셔닝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기존의 냉소적인 공중들의 바비에 대한 이미지를 마텔은 공격적인 MPR을 통해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