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청안의 조그만 결혼식장, 젊은 청년이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간에 혼자서 결혼하게 신부를 기다리며 결혼식장 직원에게 20불의 팁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웨딩드레스, 결혼반지, 부케 하나 없는 신부가 등장하였다. 신부는 오늘 결혼할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우리 만치 너무 수수하고 평범한 화장을 한채였다. 젊은 남자와 수수한 차림의 여자는 누구나 꿈꿀법한 화려한 웨딩마치를 뒤로 둘의 결혼식을 축복해주는 식구, 친구, 친지 하나 없이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922
,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신세대 커플 에디(에드워드 버네이스)와 도리스(도리스 휠리쉬맨, Doris Fleishman) 집안배경이나 현재의 지위를 고려할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올릴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숨기고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방법으로 서로에게 평생을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하였다.


둘만의 조용한 결혼 행진을 마친 그들은 뉴욕에서도 가장 전통이 있는 최고급 호텔인 월돌프 아스토리아 (Waldorf Astoria)호텔에서 결혼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호텔로 향했다. 둘은 얼마 전 벨기에의 왕과 왕비가 묵었던 스위트룸을 예약하고 "Edward L. Bernays and wife, Doris E. Fleischman"(에드워드 L. 버네이스와 그의 부인 도리스 E. 휠리쉬맨) 이라고 등록하고 체크인을 했다. 그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비밀 결혼도 하나의 중대사건이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신부가 Doris Bernays가 아닌 처녀 때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여 Doris Fleischman으로 등록한다는 것은 시대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것은 언론에게 크게 뉴스성(newsworthy)이 있는 사건이었다.


에디와 도리스가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체크인 한 후 전화를 들고 수백명의 친한 친구들에게 결혼식을 올린 사실을 전화로 알리고 이 사실이 기자들에게 알려진다. (기자들에게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다.) 다음날 미국전역의 신문은 에디의 결혼식에 관한 기사로 "도배" 하였다. 미국 전역의 250개가 넘는 신문에서는 신부, 그녀의 처녀때 성으로 호텔에 등록하다”(The bride Register under Her Maiden Name) 혹은 “Independent"라는 제목으로 결혼한 신부가 남편 이름을 따르지 않고 처녀때 (Maiden Name) 그대로 호텔에 등록한 내용을 주요 기사로 다루었다. 몇몇 신문은 1 톱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미국 문화에서는 여성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본인의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또한 이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그러던 시대에 결혼한 도리스가 남편의 성 버네이스를 따르지 않고 신부가 뉴욕의 가장 오래된 호텔인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처녀 때 성으로 등록을 것은 시대적으로 쇼킹하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월돌프 아스트리아 호텔이 갓 결혼한 신부가 처녀 때 성을 그대로 등록 할 수 있게 허용한 것 또한 큰 이야기거리가 되었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사건으로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페미니즘(feminism)을 옹호하는 호텔로 자리잡게 되어 일순간 그 성가가 치솟게 되었다.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한푼의 광고료도 지불도 않은 채 그 이름이 미국전역에 알려지게 되어 신혼여행까지도 고객을 위해 바치면서 고객을 만족시키는 버네이스의 천재성이 발휘되었고 버네이스를 PR대행사로 고용한 것에 대 만족이었다.


그와 같이 전역의 신문에서 그들의 기사가 나자 에디와 도리스 둘만의 비밀인 결혼은 그들의 친지, 친구들을 포함한 미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날이후 도리스는 미국 그리고 전세계에서 여성운동의 상징이며 선두자가 되었고, 또한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일반인들에게 여성운동을 허용한 새롭고 현대적인 호텔로 이미지를 탈바꿈하게 하여 세계의 저명인사가 뉴욕을 방문할 머물고 가는 호텔이 되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도 미국 방문시 뉴욕에 머물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묵었다. 하지만 아무도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고객이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이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에디가 17, 도리스가 16 각자의 가족여행으로 아일랜드에서 처음 만난 서로 편안한 친구로 13년간의 연애기간을 거쳐 결국은 둘만의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다.


도리스는 그 후 그녀가 여성운동의 상징이 이면에는 에디의 활약이 컸다고 밝혔다. 그들이 결혼하기 1 둘은 여성들의 "Maiden Name"(여성의 결혼 전 ) 지키는 운동을 하는 여성운동 단체인 루시 스톤 리그(Lucy Stone League) 가입하였다. 결혼식 개월 도리스는 "Doris Fleischman Bernays" 여권을 신청하였으나 그때 사회적 분위기는 그것을 허용할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을 기다린 후에야 도리스의 신청이 받아들여져 도리스는 여권에 그녀의 처녀적 성을 사용하여 여권을 발급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도리스는 초기 여성운동의 선두 주자였다. 그러나 도리스는 처녀적 성을 지킨 것에 대해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에디가 루시 스톤 리그에 가입을 권했고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체크인할 때도 결혼과 함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도리스에게 그녀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권했다" 라고 도리스는 회고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 당시 정체성에 대해 생각을 잘못하였다. 루시 스톤 리그가입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여성으로써 Maiden Name 지키려고만 하는 것이 여성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결국 그녀는 남편이름을 따라 "Doris Bernays"로 이름을 바꿨다.


도리스는 현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평생 동반자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비록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그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PR회사를 대표했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은 도리스가 내렸고 회사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버네이스는 그가 PR업에 종사하면서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에 대한 질문에서 주저하지 않고 “내 아내 도리스였다” 고 얘기 하였다. 도리스도 1955년에 집에서 주부로서 열심히 일하지만 공식적인 월급을 받지 않는(unpaid)여성의 17개 캐리어에 관한 책을 발간하여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들이 결혼한 지 40년 후 버네이스는 그의 결혼에 관한 인터뷰에서 "도리스는 우리의 결혼에 관한 기사가 미국 전역에 보도된 것에 대해 싫어했었다." 라고 밝혔다. 하지만 MPR 대가인 버네이스는 "나는 좋았다. 내가 사랑한 여인과의 결혼을 했고 나는 그것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알려야만 했다. 또한 우리들의 결혼과 우리가 일은 여성운동에 크게 기여를 했고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게는 좋은 홍보가 되지 않았나?"라고 그는 말했다. 가장 신선하고 순수해야 결혼식을 포함한 이세상의 모든 것이 마케팅의 도구가 되는 "투철한 프로정신" MPR 대가를 탄생시킬 있었던 것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5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의 김경해입니다. 큰생각과 큰PR을 위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by 김경해

카테고리

전체 (267)
CEO Thinks (5)
큰생각 큰PR (58)
Let's PR (65)
위기를 극복하는 회사 위기.. (61)
생생한 PR현장 이야기 (68)
Total : 58009
Today : 16 Yesterday :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