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에드워드 버네이스 (Edward Bernays:1892-1995)를 ‘미국PR의 토마스 에디슨’이라고 극찬하였고 라이프 매거진(Life Magazine)이 1990년 특별호에서 ‘20세기 가장 중요한 미국인 100인’중의 한사람으로서 버네이스를 선정하였다.

 

버네이스는 1892년에 태어나서 1995년에 사망하였다. 103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2세기에 걸쳐 PR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에 기여한 셈이다.

PR역사학자들은 버네이스에 대한 설명에서 ‘PR의 새벽을 연’(From Dusk till Dawn)이라는 표현을 가끔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고객에게 돈을 벌게 하는 천재적인 재주를 타고 났으며 그 덕분에 그 자신도 많은 돈을 벌었다. 말년에 고색창연한 보스톤의 캠브리지마을에서 자가용운전기사를 두고서 대저택에서 살았다. 독재자 히틀러와 미국의 역대 많은 대통령 후보자들이 그의 도움을 요구했으니 세계적인 PR인임은 틀림없다. 독재자 히틀러와 미국의 역대 많은 대통령 후보자들이 그의 도움을 요구했으니 세계적인 PR인임은 틀림없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인 1933년 버네이스는 히틀러로부터 PR자문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Hearst신문사 특파원이 히틀러의 선전상인 조셉 괴벨스를 인터뷰 했을 때 그 특파원이 괴벨스의 책상에서 버네이스의 책 Propaganda를 발견했다고 할 정도로 PR에 있어서 버네이스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말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며 98세에 한 시간당 청구금액(hourly rate)이 US$1,000이었다는 기록을 접할 수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초기 PR산업이 비윤리적이고 과장을 일삼던 어두운 시절에 태어나서 licensing을 통해 PR산업을 하나의 존경받는 직업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의미에서 버네이스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아이디어엔 무력으로 저항해도 소용없다”고 말하면서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빅토르 위고의 이 말을 실제 증명한 사람은 바로 버네이스이다. 버네이스의 PR기법은 항상 먼저 사람들의 동의(consent)를 전제로 하였고 단순한 정보 전달만이 아닌 과학적인 설득을 기반으로 그는 미국 PR산업의 ‘아버지’가 되었고 ‘아이디어’를 무기로 그의 고객의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가 평생에 이룩한 업적은 매우 눈부시다. 1차 세계 대전시에는 전시 미국의 입장을 지원하기 위한 공보위원회 (committe for Public Information)관리로부터 쿨리지 대통령 이미지 제고를 위해 ‘조찬행사’를 기획하였고 럭키스트라이크 담배회사의 여성흡연자 창출을 위해 여성의 흡연을 ‘자유의 횃불’로 명명하여 사회 인식을 변화시켰고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들 발명 50주년을 기념하여 전 세계적인 빛의 황금축제(Light's Golden Jubilee)를 기획하는 등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 버네이스가 PR업을 시작했을 때 그는 시대를 잘 만난 것이다. 1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산업은 급성장하였고 그들의 제품들을 팔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있던 시대에 그의 놀랄만한 ‘아이디어’는 기업들에게 하나의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이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즈음 전쟁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고 PR은 유럽사람들에게 효과적인 무기임이 입증되었다. 특히 영국은 미국정부와 미국인을 향하여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바다 건너 손을 잡고”라는 선전 캠페인을 폈다. 이들은 독일인들을 야만인으로 부각시키면서 연합군 측의 전승을 널리 알리는 작업을 폈다. 결국 윌슨 대통령은 중립적인 정책을 포기하고 돈과 막강한 군사력 및 고도의 PR노력을 동원하여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많은 분야에서 국민의 협조를 구했다. 전신 전화 회사는 전시에는 정부가 전화회사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데 동의했다. 언론은 언론대로 자체 검열을 실시했으며 전쟁에 필요한 광고를 무료로 게재하기도 했다. 전시 중 미국의 PR노력 뒤에 있던 인물은 신문기자 출신이며 윌슨대통령이 공공정보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죠지크릴이었다. 미국의 전시 선전이 국내외에서 그렇게 효과적이었던 것도 크릴 위원회 덕분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 위원회에서 일한 바 있는 위원들이 전시에 의한 기법을 평화 시에도 계속하여 이용했다. Ivy Lee, 버네이스와 Carl Byoir도 이크릴 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며 살아있는 PR실무경험을 익혔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크릴위원회에서 일을 한 뒤 리투아니아 국민위원회 (Lithuanian National Committee)의 리투아니아 승인을 위한 미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려는 활동을 지원했고 국방성의 제대군인 취업 알선 계획을 지원했으며 1919년에는 뉴욕트리뷴(New York Tribune)편집 차장 도리스 이 플라이스만(Doris E. Fleischman)과 함께 회사를 차렸다. 1922년 이들은 결혼했으며 부인은 1980년에 사망했다.

 

PR업에 종사하면서 새로운 고객을 영입하기 위해 보낸 시간과 기존 고객과의 conflict of interest나 또 다른 이유로 새로운 고객으로 받아들일 수없어 거절하기위해 보낸 시간이 거의 맞먹었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 PR인으로서 그는 많은 훌륭한 업적은 남겼으며 그가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고객에게 ‘노다지’를 안겨주는 PR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PR인들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큰사고’(Big Think)를 통해 그의 고객을 위해 몸 바쳤으며 또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에 과감히 도전하기도 하였다.

 

 

1. 베이컨 판촉을 위해 'American Breakfast'를 탄생시키다!

오늘날 일반적인 미국식 아침식사(American breakfast)는 유럽식 아침식사(Continental breakfast)와 구분된다. 'Continental breakfast'가 간단하게 토스트나 패스츄리, 커피, 주스 등으로 구성된 아침식사라면, American breakfast는 이 외에도 계란요리, 햄, 베이컨, 과일 등이 추가된 더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아침식사를 말한다. 특히, 미국식 아침식사에는 반드시 계란 요리가 뒤따르게 되는데, 그 종류와 특징은 요리방법에 따라 다양하며 전통적인 아침식사 메뉴로 자리잡은 '베이컨과 달걀(bacon and scrambled egg)'는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인기 있는 메뉴이다.

 

 

1920년대 중반, 대형 베이컨 생산업체인 '비치넛 패킹 컴퍼니(Beechnut Packing Company)'에서는 일상생활이 바빠진 미국인들이 아침 식사를 주스와 토스트, 커피로 대신함에 따라 감소된 판매를 복구하고자 버네이스를 고용했다.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베이컨 생산업체의 시장을 뺏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버네이스는 미국인들의 식사 습관(eating habit)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는 뉴욕의 유명한 의사를 설득해 자신의 동료들에게 아침을 든든히 먹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가볍게 때우는 것이 좋은지를 묻는 글을 쓰도록 했다. 그 결과, 아침 식사를 든든히 하는 것이 좋다는 쪽이 우세하였고, 이 이야기는 신문을 통해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의사들의 충고에 따르기 시작하자 든든한 아침 식사의 대명사로 생각되는 두 가지 음식, 즉 '베이컨과 달걀(bacon and eggs)'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이 두 음식은 미국인들의 아침 식탁에는 물론 사전에도 아침식사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미국의 식민지시대와 19세기 초까지 당시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가운 햄과 베이컨 없이 아침식사를 하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산업화에 따른 사회 변화와 함께, 미국인들의 식생활에도 변화가 생겼고, 버네이스는 든든한 아침식사의 영양학적, 의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언론보도들을 통해 미국인들의 아침식사 패턴을 바꾸는데 성공, 줄어들던 베이컨의 소비를 촉진시켰다.

버네이스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그는 그보다는 전적으로 새로운 행동 양식을 판매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일견 모호해 보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객들에게 커다란 보상을 안겨 주었으며 미국인들의 생활 구조 자체를 재정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몇몇 분석가들은 그의 방식을 '전략적 사고(strategic thinking)' 또는 '수평적 사고(lateral thinking)'(상식이나 기성개념에 구애받지 않는 여러 각도로 부터의 문제 고찰법)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것은 다른 베이컨 제조업체나 출판사를 상대로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협소하고 수직적인 사고가 아니라 보다 넓은 경제/사회적 환경에서 고객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바탕을 두고 전략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버네이스는, 우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근본적이며 직접적인 장애물을 제거해 고객의 목표를 달성하는 계획을 수립한다는 뜻에서 "간접적인 호소(appeals of indirection)"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한 일에 대해 보다 간단한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 바로 '큰 사고(Big Think)'에 바탕을 두고서 마케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PR의 전략과 기술을 이용하는 현대적 의미의 MPR인 것이다.

 

버네이스는 의식적으로 인습에 도전하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법칙은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확신하였고 자신이 현실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증명했다. 또한 그는 고객들을 그들이 생각도 못해 본 곳으로,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가 예견한 대로 대중들이 모여듦에 따라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때로는 전략이 너무나 복잡하고 모호하여 그 자신조차 종종 각종 전위그룹(front group)과, 편지쓰기 운동, 이곳저곳과의 제휴가 포함되곤 하는 각본을 따라가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름을 이니셜로 줄이는 것과 같이 놀라울 만큼 단순한 전술을 취하기도 했었다. 때로는 이러한 전략이 고객과 소비자의 근본적인 본능을 직접 자극했다. 또한, 틀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계획을 시작하여 계획적으로 대중을 속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포괄적인 구상, 즉 자신의 경쟁자들보다 훨씬 더 창의적인, 그리고 훨씬 더 자신만만하며 일반적으로 훨씬 더 비싼 저돌적이고 대담하며 폭넓은 생각이 존재했다. 높은 보수는 그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돈을 많이 받음으로써 그의 전략이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고객회사의 최고 경영자만큼 돈을 벌기 때문에 그가 전략을 함께 논의할 대상이 바로 CEO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고객들에게 확신시켜주었다.

 

버네이스는 관습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지속적인 PR을 통해 현실 자체를 변화시켰다. 여기 그가 한 말처럼 말이다.

“지금 하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에 여가 시간에만 즐길 수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라. 여가시간 만큼 일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라”

이처럼 버네이스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1920년대는 미국은 산업화에 따라 물질적 번영을 누렸던 시기이며, 기계문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은 급속한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미국이 세계대전에서의 승전과 군수 산업의 확장으로 세계 경제에서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이 전세계에 보급되었다. 이러한 물질적 번영을 배경으로 1920년대에 사회문화적 활동이 활성화되어, 20세기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대중문화가 태동하게 되었으며, 젊은이들은 재즈와 스포츠에 열광했다.

 

1922년에는 가정에 라디오가 처음 보급되었고, 1927년에는 최초의 유성영화가 등장하였으며, 린드버그(Lindbergh)가 대서양을 비행하고 자동차의 보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문화와 예술분야에서는 아르데코(Art-Deco)의 예술사조와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의한 기능주의 추구가 더욱 성숙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아르데코는 입체주의와 러시아 발레단의 형상과 색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4년에는 예술에 있어 초현실주의가 도입되었으며, 이국적 정취(Exoticism)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미국인들의 식생활과 패션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던 버네이스의 활약이 더욱 돋보이는 시기였다.

 

1920년대에 버네이스가 베이컨 회사를 위해 미국인들의 아침식사 패턴을 바꾼 것처럼, 특정 제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특히, 식품 분야에서는 권위 있는 의사 등의 주장을 인용하는 '제3자 인증(third party endorsement)'방법을 사용하거나,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기인들을 모델로 하여 일반 대중들의 의식과 라이프 스타일을 변화시킨다. 식품의 영양학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관련 협회나 그 분야의 저명 의사들의 기고문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또한, 특정 계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기 때문에, 공익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방법도 사용될 수 있다.

 

최근 있었던 유사한 사례로는, 90년대 중반 미국 유가공협회가 미국의 우유 소비 촉진을 위해 실시한 "우유 콧수염 캠페인(milk mustache campaign)"을 들 수 있다. 미국은 단일 국가로는 세계 최대 유제품 생산국으로 일년에 7천만t 이상의 우유를 생산하며 세계 우유 공급의 약 19%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유럽 국가의 2.5배 이상, 호주나 뉴질랜드 보다는 7배 이상 많은 우유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유제품 최대 생산국이라는 타이틀과 달리, 80년대 이후 미국의 우유 소비량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90년대에는 골다공증과 골밀도 감소, 골절의 발생률 증가와 같은 부정적 결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트렌드를 변화시키기 위해, 미국 유가공업자들과 미국 의회, 농림부가 함께 교육적인 행동 캠페인인 일명, "우유 콧수염 캠페인“을 벌이게 됐다. 소비촉진을 주요 목적으로 삼아 소비자들의 일상생활에 적극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졌는데, 대중들의 라이프 스타일, 육체적 체험, 상호 작용 등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유명 운동선수, 모델, 영화배우 들을 기용해 효과를 극대화했다.

 

나오미 캠벨, 브리트니 스피어스, 데이비드 카퍼필드 등을 등장시킨 포스터만으로도 사람들로 하여금 우유를 마시도록 유도할 수 있었으며, 각각의 광고에는 유명인의 일상생활과 우유가 주는 혜택을 연결시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특히, 실제로 선택된 모델들은 유명인일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우유를 좋아하고 매일 마시는 사람으로 선정해 신뢰감을 높였다. 또한, www.whymilk.com 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우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고 여러 스타들의 우유 콧수염 사진을 게재하고 가장 멋진 모델을 선발하는 '명예의 전당' 코너, 얼굴과 우유 콧수염이 난 입술을 짝짓는 '우유 콧수염 게임' 코너 등을 통해 방문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유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고 식생활 패턴에 변화를 주어, 우유 소비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최근의 전략은 버네이스의 MPR기법을 원용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2.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에 도전하여 새로운 시장개척

 

버네이스의 위대한 업적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보다도 상황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내달을 수 있는 과감한 용기와 자신감이다. 그는 유행의 색깔을 바꾸고 미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캠페인을 통해 그의 고객을 만족시켰다.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얕은 방법이 아닌 공중과의 관계 속에서 회사의 이익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효과를 낼 수 있는(cost-effective) 버네이스식의 MPR방식은 많은 우리 기업들에게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버네이스는 신문가판대와 수펴마켓에 하드커버 책이 다량 배포되기 전에 판매업자로부터 책의 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한 전략을 제안 받았다. 그는 ‘사이면 앤 슈스터(Simon and Schuster)', '하코트 브레이스(Harcourt Brace)'등 대형 출판사를 위해 일하던 1930년 그의 논리는 “서가가 있는 곳에 책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존경받는 유명인사들을 통해 문명에 있어서 책의 중요성을 선전하고, 귀중한 장서를 보관할 수 있는 서가를 설치하도록 건축가, 건설 도급업자, 실내 장식업자를 설득하였다. 이 시기에 세워진 수많은 주택에 붙박이서가(built-in bookshelf)가 설치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도시의 건축업자들에게 새로운 집을 구상할 때 하드커버의 책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책꽂이를 만들어 문화공간을 넓히게 되면 더욱 더 안락한 공간에서 미국인들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의 제안이 설득력을 얻게 되자 새로운 집들이 크고 여유 있는 책꽂이를 갖추게 되어 사람들은 이 책꽂이를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책을 소비하게 되었고 이는 책 판매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만큼의 사건이었다. 고객을 위해서는 건축설계업자들까지도 직접 만나 당돌하게 설득하였으니 그런 경험을 한 고객은 그와 수십 년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Father of Spin(1998)의 저자이며 Boston Globe지의 기자였던 레리 타이(Larry Tye)는 "광고인은 제품 판매가 목적이고 언론대행업자(press agent)는 매체에 기사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주 업무였지만 PR카운셀러로서의 버네이스는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 그 자체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하고 있다.

 

버네이스는 1923년 발간한 그의 첫 번째 저서 '여론의 구체화(Crystallizing Public Opinion)'에서 "PR은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변경시키기 위한 설득이며, 개인 및 집단과 사회 간의 조절, 해석 그리고 통합을 꾀하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실 PR인들이야말로 국가의 진정한 지배세력”이라고 말하였다.

 

성공적으로 책의 수요를 증가시킨 후 버네이스는 일류 헤어넷 제조업체인 베니다헤어넷이라는 클라이언트를 영입한다. 그 당시 베니다사에서는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헤어넷이 필요없을 정도로 머리를 짧게 자르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버네이스를 영입한 것이다. 버네이스는 당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더 많은 헤어넷을 팔려고 직접적인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보건당국을 움직여 식품에 머리카락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헤어넷 착용을 지시하게 만들었다. 또 버네이스는 여성 노동자들의 길게 풀어 헤친 머리가 공장과 식당에서 위험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PR캠페인을 전개한다. 그 결과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공장과 식품업에 종사하는 여성 고용인들은 반드시 헤어넷을 착용해야 한다는 법률을 통과시켜 판매를 신장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로 했다.

 

버네이스의 사회과학적 이론과 방법론이라는 것은 먼저 공중(대중)의 요구와 욕구(needs and want)를 조사를 통하여 파악하고 다음으로 공중의 동기/행동/태도/가치 등에 부응하는 적절한 조치를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1차대전이 끝나자 미국 여성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기 시작하였고 여성용 헤어네트 산업은 쇠퇴하게 되었다. 버네이스는 ‘베니다 하이매트(Venida Haimet)’ 라는 헤어네트 제조회사의 PR을 맡아 우선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를 통하여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헤어네트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었다.

 

당시 조사 결과 얻어진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1) 헤어네트는 여성의 외모를 아름답게 한다.

2) 가정에서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다룰 때 착용하면 매우 위생적이다.

3) 근로현장에서 머리칼이 엉클어지거나 기계에 닿아 위험하게 되는 일을 막아준다.

 

버네이스는 조사결과를 PR에 연결시켰다. 무엇보다도 발견된 3가지용도 중 하나씩에 대하여 차례로 언론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 헤어네트 사용상 소비자와 메이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이러한 방법의 PR로 헤어네트 사용감소는 상당수준 완화되었고 버네이스 자신도 이러한 PR방식이 메이커나 소비자 모두에게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PR프로그램 수행은 쌍방향 불균형 PR(Two-way Asymmetric Model)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쌍방향 불균형 PR의 특징은 과학적 설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송신자는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진실을 제공해야하며, 공공정보형 PR과 다르게 송신자와 수신자 간에 피드백을 통한 쌍방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를 가진다. 그러나 이 PR모델은 수신자보다는 송신자가 더 큰 영향을 미치려는 불균형적 효과를 의도하는 모델이다. 즉 기업이나 기관의 목적을 위해 소비자들의 의견을 측정하려는 의도가 더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효과에 대한 조사는 주로 수신자들의 태도를 분석하려는 정도이다. 이런 형태의 PR의 성공 비결을 분석해 보자면, 국민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하는가를 잘 파악하여 메시지를 작성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공중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을 표준화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버네이스는 언제나 그의 모든 PR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이전에 공중 의견 측정과 조사를 통해 효과적인 PR목표를 정의하였고 목표를 수행하였다.

 

 

3. 자신의 결혼식조차 마케팅 도구

 

뉴욕시청안의 조그만 결혼식장, 젊은 청년이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간에 혼자서 결혼하게 신부를 기다리며 결혼식장 직원에게 20불의 팁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웨딩드레스, 결혼반지, 부케 하나 없는 신부가 등장하였다. 신부는 오늘 결혼할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우리 만치 너무 수수하고 평범한 화장을 한채였다. 젊은 남자와 수수한 차림의 여자는 누구나 꿈꿀법한 화려한 웨딩마치를 뒤로 둘의 결혼식을 축복해주는 식구, 친구, 친지 하나 없이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922,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신세대 커플 에디(에드워드 버네이스)와 도리스(도리스 휠리쉬맨, Doris Fleishman) 집안배경이나 현재의 지위를 고려할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올릴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숨기고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방법으로 서로에게 평생을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하였다.

 

둘만의 조용한 결혼 행진을 마친 그들은 뉴욕에서도 가장 전통이 있는 최고급 호텔인 월돌프 아스토리아 (Waldorf Astoria)호텔에서 결혼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호텔로 향했다. 둘은 얼마 전 벨기에의 왕과 왕비가 묵었던 스위트룸을 예약하고 "Edward L. Bernays and wife, Doris E. Fleischman"(에드워드 L. 버네이스와 그의 부인 도리스 E. 휠리쉬맨) 이라고 등록하고 체크인을 했다. 그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비밀 결혼도 하나의 중대사건이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신부가 Doris Bernays가 아닌 처녀 때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여 Doris Fleischman으로 등록한다는 것은 시대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것은 언론에게 크게 뉴스성(newsworthy)이 있는 사건이었다.

 

에디와 도리스가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체크인 한 후 전화를 들고 수백명의 친한 친구들에게 결혼식을 올린 사실을 전화로 알리고 이 사실이 기자들에게 알려진다. (기자들에게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다.) 다음날 미국전역의 신문은 에디의 결혼식에 관한 기사로 "도배" 하였다. 미국 전역의 250개가 넘는 신문에서는 신부, 그녀의 처녀때 성으로 호텔에 등록하다”(The bride Register under Her Maiden Name) 혹은 “Independent"라는 제목으로 결혼한 신부가 남편 이름을 따르지않고 처녀때 (Maiden Name) 그대로 호텔에 등록한 내용을 주요 기사로 다루었다. 몇몇 신문은 1 톱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미국 문화에서는 여성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본인의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또한 이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그러던 시대에 결혼한 도리스가 남편의 성 버네이스를 따르지 않고 신부가 뉴욕의 가장 오래된 호텔인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처녀 때 성으로 등록을 것은 시대적으로 쇼킹하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월돌프 아스트리아 호텔이 갓 결혼한 신부가 처녀 때 성을 그대로 등록 할 수 있게 허용한 것 또한 큰 이야기거리가 되었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사건으로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페미니즘(feminism)을 옹호하는 호텔로 자리잡게 되어 일순간 그 성가가 치솟게 되었다.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한푼의 광고료도 지불도 않은 채 그 이름이 미국전역에 알려지게 되어 신혼여행까지도 고객을 위해 바치면서 고객을 만족시키는 버네이스의 천재성이 발휘되었고 버네이스를 PR대행사로 고용한 것에 대 만족이었다.

 

그와 같이 전역의 신문에서 그들의 기사가 나자 에디와 도리스 둘만의 비밀인 결혼은 그들의 친지, 친구들을 포함한 미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날이후 도리스는 미국 그리고 전세계에서 여성운동의 상징이며 선두자가 되었고, 또한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일반인들에게 여성운동을 허용한 새롭고 현대적인 호텔로 이미지를 탈바꿈하게 하여 세계의 저명인사가 뉴욕을 방문할 머물고 가는 호텔이 되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도 미국 방문시 뉴욕에 머물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묵었다. 하지만 아무도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고객이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이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에디가 17, 도리스가 16 각자의 가족여행으로 아일랜드에서 처음 만난 서로 편안한 친구로 13년간의 연애기간을 거쳐 결국은 둘만의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다.

 

도리스는 그 후 그녀가 여성운동의 상징이 이면에는 에디의 활약이 컸다고 밝혔다. 그들이 결혼하기 1 둘은 여성들의 "Maiden Name"(여성의 결혼 전 ) 지키는 운동을 하는 여성운동 단체인 루시 스톤 리그(Lucy Stone League) 가입하였다. 결혼식 개월 도리스는 "Doris Fleischman Bernays" 여권을 신청하였으나 그때 사회적 분위기는 그것을 허용할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을 기다린 후에야 도리스의 신청이 받아들여져 도리스는 여권에 그녀의 처녀적 성을 사용하여 여권을 발급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도리스는 초기 여성운동의 선두 주자였다. 그러나 도리스는 처녀적 성을 지킨 것에 대해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에디가 루시 스톤 리그에 가입을 권했고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체크인할 때도 결혼과 함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도리스에게 그녀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권했다" 라고 도리스는 회고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 당시 정체성에 대해 생각을 잘못하였다. 루시 스톤 리그가입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여성으로써 Maiden Name 지키려고만 하는 것이 여성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결국 그녀는 남편이름을 따라 "Doris Bernays"로 이름을 바꿨다. 도리스는 현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평생 동반자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비록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그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PR회사를 대표했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은 도리스가 내렸고 회사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버네이스는 그가 PR업에 종사하면서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에 대한 질문에서 주저하지 않고 “내 아내 도리스였다” 고 얘기 하였다. 도리스도 1955년에 집에서 주부로서 열심히 일하지만 공식적인 월급을 받지 않는(unpaid)여성의 17개 캐리어에 관한 책을 발간하여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들이 결혼한 지 40년 후 버네이스는 그의 결혼에 관한 인터뷰에서 "도리스는 우리의 결혼에 관한 기사가 미국 전역에 보도된 것에 대해 싫어했었다." 라고 밝혔다. 하지만 MPR 대가인 버네이스는 "나는 좋았다. 내가 사랑한 여인과의 결혼을 했고 나는 그것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알려야만 했다. 또한 우리들의 결혼과 우리가 일은 여성운동에 크게 기여를 했고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게는 좋은 홍보가 되지 않았나?"라고 그는 말했다. 가장 신선하고 순수해야 결혼식을 포함한 이세상의 모든 것이 마케팅의 도구가 되는 "투철한 프로정신" MPR 대가를 탄생시킬 있었던 것이다.

 

 

4. 여성시장을 송두리째 고객에게 안기다.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우리가 현재 담배라고 부르고 있는 궐련(얇은 종이로 가늘게 말아 놓은)담배(cigarette)를 피우기 시작하였고 산업혁명과 함께 담배가 대량생산되었지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중 미국 담배회사들은 병사들에게 무상으로 보급품에 포함시켜 담배를 공급하였고 그 결과 전쟁 후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담배가 지금처럼 건강을 해치고 폐암을 유발한다는 조사가 나오지 않아 담배 판촉 전략을 아무런 사회적인 저항 없이 실시 할 수 있었던 시대였기에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그의 마케팅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인기 브랜드였던 럭키스트라이크 제조회사인 아메리칸 토바코사의 조지 워싱턴 힐 (George Washington Hill)사장은 그 당시 MPR의 대가였던 버네이스를 찾았고 버네이스는 아메리칸 토바코사를 고객으로 영입하게 되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 담배의 유해성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면서 버네이스는 그가 담배 판촉 전략에 깊이 개입한 것을 후회하면서 답배가 TV에 광고로 노출되는 것을 막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의 독특한 시대상황은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금기시 되어있는 아주 폐쇄적인 사회라는 것도 염두에 두고서 버네이스가 수행한 여러 가지 전략을 분석해야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담배소비의 증가는 미국의 승전만큼이나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참가당시 담배(cigarettes)는 맛이 없거나 피우는 것이 별로 남자답지 못하다고 간주되어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시가(cigar)나 파이프 또는 씹는 담배를 선호했다. 그러나 전쟁참호 속에서 시가나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것을 연상해보라. 시가나 파이프의 진한 냄새 때문에 적에 쉽게 노출되어 목숨까지 잃고 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될 수 도 있다. 이때 지금과 같은 담배인 궐련(cigarette)이 나타났으니 그 편리성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담배회사들은 더 순하면서 입에 맞는 제품으로 군인들의 입맛을 돋구었다. 그 결과 담배는 미국 군인의 필수품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에 따라 담배의 소비가 남성들 사이에 급증하면서, 담배회사들의 이윤도 놀랄만한 신장을 기록하였다.

 

아메리칸 토바코사의 힐사장은 시장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었다. 남성시장 공략은 1차 세계대전에 크게 힘입어 계획 되로 이뤄지고 있었으나 꽉 막혀있는 여성시장을 위해 머리를 짜기에 분주하고 있을 때 버네이스를 만난 것이다.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담배 피우는 것이 별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여져 여성들이 담배를 즐기게 되면 '앞마당에서 큰 금광광맥'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여성시장 공략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기록을 보면 힐 사장도 마케팅에 대해 상당히 깊은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힐은 버네이스를 직접 만나기 전부터 벌써 그의 머리 속에는 여성들이 사탕, 초코렛등 달콤한(sweet)디저트를 좋아하는 습관 때문에 비만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달콤한 스위트 대신 담배를 피우게 하면 그 시장 규모는 예상외로 커질 것이라고 생각해고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거기에 맞는 슬로건 하나도 마련되어있다.

그 구호는 "달콤함 디저트 대신에 럭키(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Reach for Lucky instead of a Sweet)"이었다. 버네이스가 개입하면서 현재의 광고카피에 가까운 슬로건으로 변한다. 그는 “입에서 한 순간의 즐거움이 있지만, 그 여파는 10년 동안 엉덩이에 남는다.” (A moment in the mouth and 10 years upon the hips)라는 슬로건으로 여성들에게 다가간다.

 

버네이스가 36세 때 (1928년) 힐사장을 위해 일을 시 작했고 그 당시 힐은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의 최대 잠재시장인 여성고객을 끌어들이는 승리의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버네이스는 나중에 회고했다. "만약 내가 여성신규시장을 뚫을 수만 있다면, 나의 몫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앞마당에서 새로운 금광광맥하나를 발견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힐은 어느 날 버네이스에게 말했다고 회고했다.

 

 

1) 살찌게 하는 단 음식대신에 담배를 디저트로!

 

고급식당에서 가끔 식사가 끝나면 고급시가나 꼬냑을 권하는 경우가 있었다. 버네이스는 1920년대 그의 고객을 위해 식사가 끝난 후 디저트 메뉴에 담배를 끼워 넣는 데 성공하였고 그 당시 권위 있었던 영국의료연합회의 전임회장 조지 부칸 박사를 통해 담배는 식사 후 입안을 소독해주고 입안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발표하게 하여 실제 담배를 디저트로 애용하게 만들었고 또 널리 디저트로 애용되던 사탕이나 초코렛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여 초코렛이나 사탕제조업체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들의 생활패턴을 바꾸는데 도전하였고 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1928년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담배가 2차 대전 이후 전쟁에 나가 있는 남성들을 대신하여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금기시 되어있었기 때문에 소비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버네이스는 이 새로운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여성고객 들에게 "담배가 식욕을 억제해 준다" 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버네이스는 본격적으로 여성들의 담배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단 음식에 손이 가지 못하게 하는 안티스위트(Anti-Sweets) PR캠페인을 시작했다.

버네이스는 PR 캠페인의 첫 번째 단계로 사진작가, 음악가, 화가, 예술가들을 이용하여 날씬한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그 중 한 방법으로 전문 사진작가 니콜라스 뮤레이에게서 "날씬하고 기품 있는 여성들이 몸매관리를 위해 디저트 대신에 흡연을 하는 모습이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새로운 기준"이라는 전문가의 견해를 얻게 되었고,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이와 같은 내용의 의견을 받은 후 이들을 주요 언론에 노출시켰으며, 언론은 그들의 전문가적 견해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여성상에 대해 다양한 보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버네이스는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연예인, 운동선수, 댄서 등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잡지와 신문사들에게 보내어 여성의 날씬함이 하나의 새로운 미의 트랜드로 자리잡도록 했다. 그 결과 패션잡지 편집인들은 아름답고 날씬한 파리 모델들의 사진을 화보에 담았고 통통한 여성보다는 날씬한 여성이 더 매력적이고 여성스럽다는 기사를 실었다.

 

두 번째 단계로 버네이스는 전문가들에게 담배의 우수성과 역할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하게 하고 그 결과를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는 영국의료인협회의 전임회장 조지 부칸박사를 동원하여 언론에게 "달콤한 디저트는 치아를 썩게 하고 건강을 해친다. 식사를 건강하게 마무리하는 방법은 과일, 커피 그리고 담배"라고 설명하게 하여 담배판촉 작전을 전개하였다. 누구나 인정하는 전문가. PR에서는 그들을 제3자 (Third Party)라고 부르고 있다. 이를 이용하여 그들의 인증 (Third -Party Endorsement)을 받게 되면 신뢰성이 높아지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부칸 박사는 언론에게 "과일은 잇몸을 튼튼하게 하고 치아를 깨끗하게 하며, 커피는 입 속에 침을 돌게 하여 구강 청정제 역할을 하고, 담배는 입안을 소독해주고 입안을 편안하게 만든다"라고 브리핑했다. 담배가 입안을 소독한다고 한 부칸 박사의 말이 얼마만큼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도 있었다.

 

버네이스는 이러한 언론보도에 만족하지 않고 담배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 패턴이 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는 유명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담배가 하나의 디저트 메뉴로 오르게 하기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오늘의 우리들이 보기에는 "P"나게 "R"리는 PR을 고객을 위해 수행한 것이다. 그는 유명 주부잡지인 하우스 앤 가든 (House & Garden)의 편집장에게 과식할 위험에서 구해줄 담배가 들어간 건강 식단, 디저트 메뉴를 새로이 개발한 자료를 기사화 되게 하여 가정주부들에게 널리 알리게 했다.

 

또한 주부잡지 기고가들이 그들의 기고나 저서를 통해 부엌선반에 밀가루, 설탕 등과 같이 담배를 놓을 자리를 따로 마련하는 내용을 삽입 시키게 교섭하고 집에서의 담배는 설탕, 소금, 차, 커피와 함께 빠져서는 안 될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가정주부의 기본 필수품이라고 인식하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버네이스의 노력에 의해 담배는 미국여성과 가정에서의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그 어느 PR캠페인도 버네이스의 안티스위트 캠페인처럼 상세하고 여러 방법이 동원된 적은 극히 드물다. 그의 온갖 정성이 담긴 24박스의 안티스위트 캠페인과 관련된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는 버네이스의 사무실에서 "뉴욕커 (The New Yorker)", "라이프 (Life)", "하버드 람푼 (Harvard Lampoon)" 같은 당시 최고의 잡지가 버네이스의 안티 스위트 캠페인을 깊이 있게 다룬 내용도 있다. 특히 "입속에서의 한 순간 즐거움이 10년 동안 엉덩이에 남는다(A moment in the mouth and ten years upon the hips)" 같은 내용의 유머가 있는 슬로건을 그림과 함께 기사화 되어 그 캠페인을 더욱더 성공적으로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버네이스의 안티스위트 캠페인으로 큰 타격을 보게 된 설탕, 초콜렛, 코코아, 땅콩버터, 사탕업체들은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에게 항의편지를 보냈고 유타주의 상원의원인 리드 스무스(Reed Smooth)는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의 안티 스위트 캠페인은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가득찬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버네이스는 이러한 논쟁은 그의 의뢰인인 힐에게 또 하나의 좋은 언론노출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활용하였다. 논쟁이 벌어지면 럭키스트라이크와 아메리칸 토바코사 힐사장에 대해 언론에 대량 노출되어 돈 안들이고 광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버네이스는 여론선도자들에게 "최근 일어나고 있는 설탕, 사탕업체들과의 논쟁에서 담배는 그들의 새로운 경쟁자이다. 시민들은 양쪽의 의견을 공평하게 전해들을 권리가 있고 이것이 자유경쟁의 민주주의 원칙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아메리칸 토바코사가 여론선도자들에게 내보내게 하였고 그 주장은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버네이스의 논리는 신문 사설 등에 잘 반영되어, 그 논쟁에서 이긴 버네이스는 담배가 기존 기호품과의 새로운 경쟁자이고 안티스위트 캠페인 또한 일반 소비자가 알아야 할 권리라는 논리로 제과업체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세상일은 항상 호사다마가 아닌가? 버네이스의 성공적인 마케팅활동을 시기한 사람들이 아메리칸 토바코의 공장 직원들 중 나환자가 있었고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를 피우면 문둥병에 걸린다는 소문까지 퍼트려 루머를 잠재우는데 물두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러나 버네이스의 안티 스위트 PR 캠페인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로 럭키스트라이크의 매출이 3배 이상 올랐고, 그 해의 순이익이 3천2백만 불이었다.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의 힐은 대단히 만족하였으며, 버네이스는 성공한 MPR의 대가로 두둑한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

 

 

 

2) 여성흡연을 여권신장운동과 결부시켜 거대 여성시장 공략

 

당시 시대상황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성흡연에 대해 금기시 하는 분위기였다. 이 뿌리깊은 인습을 하루저녁에 타파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뉴욕의 번화가에서 버네이스가 기획한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퍼레이드였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성흡연 금기를 누가 결정적으로 깨뜨린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훌륭한 카피를 쓴 광고 카피라이터, 1년 정도 전에 버네이스보다 연봉 $15,000을 더 받고 힐사장을 도와준 아이비 리(Ivy Lee), 버네이스... 등 여러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대체적인 의견은 버네이스의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버드대 브란트(Allan M. Brant)교수도 버네이스의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가 여성흡연 금기를 깨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1929년 초 버네이스의 안티스위트 캠페인에 힘입어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의 매출은 늘었지만 힐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매출을 더 높이기 위해 버네이스에게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마음껏 흡연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의뢰를 했다. 당시 여성들의 공공장소에서의 흡연금기시는 다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기에 그들 도와줄 전문가를 찾는다. 버네이스는 그의 삼촌이며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제자인 심리학자 브릴(A.A. Brill)박사에게 여성흡연에 관하여 조언을 받는다. 또다시 제3자 인증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 PR인과 고객사이의 신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버네이스는 브릴박사에게 자문을 받기 위해 그 금액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상당한 금액을 힐 사장이 지불해주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PR인은 항상 소비자 설득이전에 고객을 먼저 설득시켜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힐사장이 추가적인 자문을 거절했다면 상황은 아주 달라지게되는 것이다. 힐사장은 버네이스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의 많은 제안들을 수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브릴 박사는 "여성들이 흡연을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시대가 바뀌어 감에 따라 남성들과 같이 일하는 여성들도 바뀌어가고 있다. 여성들의 출산이 줄어들고, 여성 본래의 여성스러움이 조금씩 없어지며, 남자들을 대표하던 담배가 여성들에게는 자유의 횃불로 변화해가고 있다."라는 조언을 했다. ‘자유의 횃불’ 카피라이팅의 대가 버네이스가 이 말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 슬로건 하나면 오랫동안 미국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인습하나를 뽑아 버릴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또 하나의 승리를 확신하게 된다. 그의 머리 속에는 브릴 박사가 제시한 개념을 가장 잘 구체화형 할 수 있는 이벤트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버네이스는 당시 뉴욕의 가장 번화가였던, 5번가(Fifth Avenue)에서 자유를 상징하는 날인 부활절(Easter Sunday)에 한 여성이 당당하게 자유의 횃불(담배)을 들고, 여성의 흡연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며, 시위를 하는 것을 떠올렸다. 이것이 바로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흡연할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그는 바로 " 자유의 횃불" 캠페인을 실행에 옮겼다.

 

우선적으로, 버네이스는 30여명의 뉴욕 사교와 패션계 인사들에게 그의 비서인 버다 헌트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와 젊은 여성들이 5번가에서 부활절에 자유의 횃불을 밝힐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여성들이 가정, 레스토랑 등 실내에서만 담배를 피울 수 있고,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편견을 없애기 위해 여성 흡연자들과 그녀의 동지들은 5번가의 48번 거리에서 54번 거리까지 오전 11시 30분부터 1시까지 시위를 할 것 이라고 설명 했다. 물론 버다 헌트가 버네이스의 비서라는 신분을 전혀 노출 시키지 않았다.

위와 같은 내용의 신문광고도 게재했는데 이 광고는 그 당시 유명한 여권신장운동가인 루스 헤일(Ruth Hale : New York World의 저명한 컬럼니스트인 헤이우드 브라운의 부인)이 직접 서명한 광고라서 더 큰 효과를 갖게 되었다. 제3자 인증을 즐기던 버네이스의 기법을 다시 대하게 된다.

 

버네이스의 지휘 아래 "자유의 횃불" 캠페인의 시나리오는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각본 되었다. 그는 이 여성들의 반란이 먼저 언론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그 후 여러 단체들이 주요언론에 그 반란에 대한 반박문을 게재할 것이라 예상하고 각 매체에 대하여 철저한 모니터를 지시하였고 예상되는 반박에 대한 답변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

 

또한, 버네이스는 당시 최고의 갑부였으며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던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매주 일요일마다 예배를 다니는 뉴욕침례교회와 성 토마스와 성패트릭교회들이 5번가에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그 교회들을 지나갈 때, 예배를 보던 여성들도 같이 시위에 참여 하도록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시위에 참가할 여성들은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였으나 늘씬하고 매력적인 여성을 주축으로 선발하였으며, 또한 언론들이 신문에 싣기에 적합한 사진을 못 찍을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전문사진작가도 섭외 해두었다.

 

드디어 1929년 3월 31일 부활절에 버다 헌트라는 한 매력적인 여성이 뉴욕의 가장 번화가인 5번가에서 럭키스트라이크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며 행진을 시작했다. 그녀와 6명의 동지들은 "자유의 횃불"을 들고 여성의 인권, 여성의 흡연권을 주장하며, 록펠러가 예배를 드리는 5번가의 침례교회를 당당하게 걸었다. 물론 보도자료를 통해 이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 행사 내용을 전해들은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고 그녀와 그녀의 동지들은 포즈취하기와 인터뷰하기에 바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자유의 횃불에 대한 아이디어는 내가 처음 길거리에서 흡연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남성이 저에게 와서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기 싫으니 담배를 꺼달라고 부탁했을 때였습니다. 저와 저희 친구들은 더 이상 여자라고 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시위를 하기로 계획 했습니다"라고 밝혔다. 물론 그녀의 대 언론 메시지는 버네이스가 미리 써준 내용이었다.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는 버네이스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미국사회에 파문과 관심을 일으켰다. 미국 전 지역의 모든 신문, 방송들은 여성들의 자유를 부르짖는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를 보도했고, 레리 타이(Larry Tye)는 "The Father of Spin"에서 "아무도 버네이스와 그의 클라이언트인 아메리칸 토바코 담배회사가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 행사를 뒤에서 조종했다는데 대해 어떠한 지문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한 여성이 기획한 퍼레이드로 만들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버네이스는 자유의 횃불 퍼레이드의 배후를 철저하게 숨겼고 자신의 의도대로 성공시켰다. 레리 타이는 이 행사는 모든 PR인들이 꿈조차 꾸기 힘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하면서 또 하나의 다른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이 행사의 기획자가 버네이스라는 사실과 뒤에서 아메리칸 토바코사의 힐 사장이 숨어있다는 사실에 대해 ‘지문’(fingerprint)도 하나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해치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또다시 버네이스가 수행한 ‘스핀’(spin)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당당하게 앞에 나서지 않고 수행한 비윤리적인 PR프로그램진행 때문에 버네이스가 ‘스핀의 아버지’(The Father of spin)이라고 불리기도 한 것이다.

 

그 후 보스톤,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등 각 지역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흡연을 하기 시작했다. 각 언론들은 길거리에서의 여성흡연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버다 헌터가 5번가에서 "자유의 횃불"을 지핀 몇 주일 후 미국의 브로드웨이 극장 남성전용 흡연실에서도 여성들의 입장을 허락했으며 드디어 5주후 뉴욕시의 대부분의 극장들은 여성전용흡연실을 마련하였다.

 

버네이스의 "자유의 횃불" 캠페인은 표면적으로는 남녀평등과 여성의 자유를 상징 하였으나 그 뒤에는 상업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성의 흡연이 늘어 감에 따라 아메리칸 토바코사의 수익은 더 더욱 늘어났다. 또한, 버네이스는 또 한번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자유의 횃불" 캠페인은 PR교과서에 가장 성공적인 판촉 캠페인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많은 학교와 기업체에서 버네이스의 "자유의 횃불" 캠페인에 대한 열띤 강의와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안티스위트 캠페인과는 전혀 다른 전략을 도입 하여 또 다른 성공을 기록하였다.

 

 

㈜ 다음은 로버트 그린의 저서 '유혹의 기술'(The Art of Seduction: 강미경 옮김, 이마고)의 부록에 나오는 자유의 횃불 캠페인 내용을 전제한 것이다.

 

1929년 3월 31일 부활절 일요일이었다. 뉴욕의 교인들은 해마다 열리는 오전 부활절 행사를 마치고 5번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리는 봉쇄되었고, 수년 동안 그래왔듯이 사람들은 제일 좋은 옷을 차려 입었다. 그 중에서도 최신 봄 유행으로 잔뜩 멋을 부린 여성들의 옷차림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 해 5번가에 있던 사람들은 색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젊은 여성 두 명이 성토머스 교회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그들은 지갑을 열어 담배(럭키 스트라이크라는 상표가 붙은 담배였다)를 꺼낸 다음 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군중들 사이에서 잠시 동요가 일었다.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로, 숙녀가 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렇고 그런 여자들만이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때였다. 하지만 예의 두 여성은 우아한 멋쟁이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몇 분 후, 그들이 그 옆 교회에 당도하면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들처럼 우아하게 차려 입고 교양도 있어 보이는 듯한 젊은 아가씨 두 명이 교회에서 나오더니 담배를 들고 있는 두 여성에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담배를 꺼내 그들에게 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네 명으로 불어난 여자들은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여성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곧이어 열 명의 여성들이 마치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듯 공공연하게 담배를 물고 있었다. 어디선가 사진작가들이 나타나 이 새로운 광경을 찍기 시작했다. 대개 부활절 행렬에서는 새로운 모자 모양이나 새로운 봄 색상에 대해 수근거리는 것이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해에는 모든 사람들이 대담한 아가씨들과 담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그들에 대한 사진과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한 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급히 타전했다. "진한 회색 정장 차림으로 페데리카 프레일링휘센 양이 세인트패트릭 교회 앞에 모여 있던 군중을 헤치고 씩씩하게 걸어 나갔듯이, 버사 헌트 양과 그녀의 동료 여섯 명도 여성들의 자유를 위해 또 다른 한 방을 날렸다. 그들은 담배 연기를 흩날리며 5번가를 내려갔다. 흡연권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가 있었던 다음날 헌트 양은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우리가 뭔가를 시작했기를, 아무도 반기지 않는 이 자유의 횃불이 여성들에게만 강요되어 온 담배에 대한 금기를 깨부수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우리 여성은 모든 차별을 철폐해나갈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문지상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곧이어 다른 도시의 여성들도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몇 주 동안 찬반논쟁이 오갔다. 새로운 조류를 비난하는 신문사가 있는가 하면, 여성들을 옹호하는 신문사도 있었다. 하지만 몇 달 후, 여성들의 공공연한 흡연 행위는 사회적으로 용인 받게 되었다. 거기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1929년 1월 뉴욕의 사교계에 몸담고 있던 몇몇 여성들은 버사 헌트라는 한 여성으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부활절 행렬이 5번가를 지나는 동안 저를 비롯한 젊은 여성 몇 명이 담배를 피움으로써 자유의 횃불에 불을 당기고자 합니다." 그 행사에 참가하기로 한 여성들은 헌트가 비서로 일하는 사무실에서 사전에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들르게 될 교회와 만나는 방법을 비롯해 세부사항을 논의 하였다. 헌트는 그들에게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을 건네주었다. 약속된 날, 계획대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헌트의 상사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라는 인물로 럭키 스트라이크의 제조업체인 아메리칸 토바코이사의 PR담당 고문이었다. 미국 담배회사들은 다양한 광고로 여성들에게 흡연을 권유하고 있었지만, 길거리에서의 흡연이 숙녀답지 못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던 탓에 소비가 더 이상 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아메리칸 토바코사의 힐사장은 버네이스에게 도움을 청했고, 버네이스는 나중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기술을 적용해 사장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그의 기술이란, 언론에서 뉴스로 다를 만한 이벤트를 만들어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세세한 부분까지 철저히 준비하되 자발적으로 보이게 해야 했다. 이 '행사'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점점 많은 여성들이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이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홍보 활동가라고 할 수 있는 버네이스는 판매의 기본 원칙을 꿰뚫고 있었다. 우리의 의도를 눈치 채는 순간, 상대는 경계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파내 의도를 뉴스 이벤트로 위장할 경우, 상대의 저항을 불식시키는 한편 판매 행위 자체를 하나의 사회적인 추세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언론에서 다루는 다른 이벤트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이벤트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앞서 나가거나 의도적인 냄새가 나서도 안 된다. 부활절 행진의 경우, 버네이스는(버트 헌트를 통해) 손에 담배를 들고도 우아해 보일 수 있는 여성들을 골랐다. 하지만 사회적 금기를 깼다는 점에서, 그것도 집단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그가 선정한 여성들은 언론이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는 극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언론의 관심을 끌려면,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버네이스가 여성들의 반발심을 자극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듯이, 이벤트를 마련할 때는 긍정적인 면과 연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애국심이나 성적인 측면, 혹은 정신적인 측면과 연계시킬 경우,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니게된다. 거기에 어느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판매전략의 일환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무작정 군중 틈에 섞이고 본다. 지금 막 태동하고 있는 새로운 운동의 물결에서 밀려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우선으로 일할 준비가 되겠다는 조건하나로 연 $25,000(US $25,000 a Year Just to be Available)

 

1929년간 버네이스가 36세였을 때 1년간 아메리칸 토바코사와 계약을 맺으면서 최우선적으로 아메리칸 토바코사 일을 하겠다는 조건하나로 1년에 25,000달러를 일시불로 받았으니 놀란 만한 일이다.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조건 하나뿐이지 실제 서비스 업무에 들어갈때는 별도의 청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929년에 이런 ‘최첨단’ 청구기법을 개발했다는 데는 PR역사상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 'Just to be available' (최우선적으로 일할 준비태세 갖추는 것)에 대해 돈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PR업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리고 법률 회사와 PR회사의 청구방식에 대해 버네이스의 주장에 우리 PR인들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필자의 회사가 한 외국기업의 위기관리 프로젝트를 맡아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 프로그램을 짜고 또 그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기고 있을 때 법률 회사가 법률적인 자문을 제공하기 위해 개입 한 적이 있다.

 

그때 PR회사에서 근무하는 우리 PR인들 스스로도 법률회사의 청구가 PR회사의 청구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양쪽의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받고 있는 고객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약3개월 동안 그 프로젝트를 끝내고 그 고객 회사에서 직접양쪽과 같이 일한 한 한국인 직원과 서로 인간적인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그 직원의 고백은 법률회사의 청구서는 PR회사의 청구서와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마음이 무척 상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PR회사의 청구금액이 법률회사와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버네이스에 관한 책에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PR어드바이스가 법률적 조언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법률적 조언은 이미 세워진 선례에 근거한 것이지만 PR어드바이스는 사실상 그 선례를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변호사들이 의뢰인들에게 청구하는 금액을 조사해서 그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청구했다.” 우리도 버네이스처럼 법률회사 보다 높게 청구할 수 있을 정도의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고 청구서를 PR회사가 청구하더라도 그것을 고객이 승인하는 때가 오게 해야겠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고객이 PR회사의 전략이 법률회사의 전략보다 더 효과적이고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3) 고객을 위해서는 유행의 색깔까지도 바꾼다!

 

앞의 대 성공적인 두 개의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마케팅 활성화에 장애요인이 나타나 마침표를 찍는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녹색무도회 캠페인이다.

 

1934년, 버네이스의 안티스위트 캠페인과 자유의 횃불 캠페인 이후 여성의 흡연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이 두 캠페인에서 럭키스트라이크라는 브랜드를 직접적으로 노출하지 않았던 아메리칸 토바코 사는 "럭키 스트라이크"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에서 여성들이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 케이스의 녹색이 여성들이 좋아하는 색깔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된 힐사장은 또 다시 버네이스를 찾았다. 담배 케이스의 색깔을 여성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바꾸는 것이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 버네이스는 아메리칸 토바코사에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담배 케이스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발생하기에 경영진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버네이스는 패션의 유행색을 녹색으로 만들겠다고 제안한다. 버네이스의 제안은 열띤 논란을 거친 후 받아들여지고 버네이스는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한 이 유행색깔 바꾸기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한 PR인이 유행의 색깔까지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버네이스는 PR의 힘 (power)를 과시한 것이다. 그의 힘(power)은 그의 천재적인 기획력에서 창출되었으나 그는 아주 겸손하게 공중의 동의 (consent)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먼저, 녹색을 분석하였다. 그 분석에서 녹색은 희망, 소망, 승리, 풍부함을 상징했고 또한 평화와 고독함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 패션계에서 새로 출시된 옷들 중 20%가 녹색계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버네이스의 분석결과 녹색을 유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패션계에 녹색과 관련하여 대대적인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를 위해 뉴욕 최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뉴욕 사교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녹색무도회‘(Green Ball)를 열기로 하였다. 녹색 무도회의 주최로는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가 아닌 내셔널 시티 은행(National City Bank) 전회장의 부인이자 뉴욕 여성진료소(Women's Infirmary of New York)의 회장으로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프랭크 밴더립 (Frank A. Vanderlip) 여사에게 의뢰한다.

 

버네이스는 그녀에게 무도회 수익금 전부는 불우가정 어린이들에게 우유, 옷 들을 기증하고, 심장병 환자와 여성 진료소 지원에 사용할 것이라 약속하였고 행사에 필요한 25,000불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그의 고객이 제공하겠다고 했다. 버네이스는 프랭크 밴더립 여사를 통해 녹색무도회 이름처럼 녹색이 행사 테마였고 초청받은 모든 참석자는 녹색 드레스나 예복을 의무적으로 입어야 한다는 초청장을 뉴욕을 대표하는 사교계 인사들에게 보냈다.

 

녹색을 유행으로 만들기 위해 버네이스는 각 패션과 액세서리 업계들을 접촉했다. 녹색무도회를 위해서는 녹색 드레스를 만드는 패션하우스도 필요하지만 녹색 드레스에 어울리는 녹색 장갑, 구두, 손수건, 헤어 악세서리, 모자, 그리고 보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논다가 (Onondaga) 실크회사의 사장인 필립 보글만에게 녹색무도회에 대해 자세한 소개와 함께 앞으로 녹색이 새 유행 트랜드가 될 것이라고 귀뜸했다. 또한, 버네이스는 보글만에게 그의 회사가 이 새 유행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에게 녹색 가을패션 오찬(Green Fashion Fall Luncheon) 행사를 마련하도록 했다. 물론 그 오찬의 메뉴는 완두콩, 아스파라가스, 허브로 버무린 프랑스 양고기, 녹색빛 나는 민트 칵테일 등 모든 메뉴는 녹색테마의 음식이었다. 또한 헌터 컬리지(Hunter College)의 미술 대학 총장은 오찬 자리에서 "위대한 미술가들의 작품속의 녹색"에 대한 강연을 하였고 예술가들이 표현한 녹색의 심리학적인 측면을 소개하였다.

 

다음날, ‘뉴욕 선 (New York Sun)은 1면 주요 뉴스로 ‘녹색 겨울‘(It Looks Like a Green Winter)이란 제목으로 올해는 녹색이 유행될 것을 예보했다. ‘더 포스트’(The Post) 또한 "녹색 가을"이란 제목으로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버네이스는 녹색 유행을 위해 여성들의 옷 색상과 집 인테리어의 커튼색이 맞지 않을 고려하여 오논다가 실크 회사의 지원으로 버네이스가 주도해 만든 전위 그룹(front group)인 칼라패션사무국(Color Fashion Bureau) (버네이스가 즐겨 사용한 front group: 그 정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면서 앞에 나서는 일종의 위장 단체) 이름으로 각 인테리어 장식가, 미술협회, 여성클럽 들에게 새로운 유행이 될 색깔인 녹색에 대해 소개하는 편지들을 보내게 했다. 칼라 패션 사무국은 5,000여 백화점과 상가매장 매니저들에게 새 유행인 녹색에 관련한 발표문을 보냈으며, 그 결과 77개 신문사, 95개 잡지사, 301개 백화점, 145개 여성클럽, 175개 라디오 방송국, 83개 가구점, 64명의 인테리어 장식가, 49명의 사진작가, 그 외 일러스레이터 등으로부터 놀랄만한 반응을 얻게 되었다.

 

뉴욕 5번가 디자이너 부티크들에서의 쇼 윈도에는 녹색 가운, 수트, 악세서리 등으로 장식되었고 유명 패션지 ‘보그’(Vogue)는 뉴욕의 녹색 드레스 트랜드에 관련한 스케치 기사를 실었다. 심지어 버네이스의 활동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럭키스트라이크의 경쟁업체인 "카멜(Carmel)"은 그해 11월 광고에 럭키스트라이크 케이스의 색인 녹색에 빨간 라이닝이 들어간 드레스 입은 여자들이 광고 모델로 나왔을 정도였다. 또한, 버네이스의 시나리오 대로 "녹색무도회" 행사에 관련한 준비는 계획대로 성황리에 끝마쳤으며,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의 "녹색무도회" 행사 또한, 보그 잡지의 평과 같이 인상적으로 끝이 났다. 보그는 "녹색무도회" 행사에 대해 "녹색무도회는 즐겁고, 발랄하면서 강렬한 이미지가 기억에 남을 만한 행사였으며,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녹색 조명 불빛과 아름다운 모델들의 녹색 드레스는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루었다"고 했다. 버네이스조차도 녹색의 유행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했다. 힐은 버네이스에게 또 한번의 막대한 보너스를 줌으로서 녹색의 성공을 높이 평가했다.

 

PR측면에서 녹색무도회가 시사하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첫째 집중적인 언론관계와 다양한 PR의 도구(Tools)를 통한 종합적인 프로그램을 짠 것이다. 녹색무도회의 경우 언론관계 측면에서 뉴스가치가 있는 내용을 개발하고 이를 언론에 적극적으로 제공했다. 또한 녹색 트랜드를 형성하기 위해 무도회 수익금의 기증, 잡지의 스케치 게재 등 다양한 방법들을 실행하여 보도를 하지 않는 매체는 뭔가 놓치게 된다는 생각을 주입시켰다.

둘째 정신분석학 및 심리학적 방법 활용으로 여론조성을 꾀했다. 버네이스는 설문조사를 통해 럭키 스트라이크의 녹색 담배케이스가 여성들이 좋아하는 옷색깔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와 관련해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녹색에 대한 색감과 상징적 이미지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PR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했다. 조사 (research)가 PR 프로그램 기회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계기가 되었다.

 

셋째 언론 및 공중이 주목하게 되는 PR이벤트를 적절히 활용하였다. 버네이스는 녹색을 패션의 유행색으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녹색 테마로 한 녹색무도회를 활용해 언론의 주목과 공중의 변화를 꾀했다는 것도 획기적인 기획과 실행 프로그램이다. 또한 녹색 가을패션 오찬 행사도 마련하여 새로운 유행 트랜드의 형성을 유도하는 마무리 작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마침표 (punctuation)찍는 작업이 없어 성공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예상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 사례가 많이 있다. 버네이스가 기획한 3가지 담배마케팅전략은 그의 주가를 높이고 PR의 마케팅 활성화기능을 만천하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버네이스와 위기관리

 

1930년대는 기업의 위기관리에 대해 사전 대응적(proactive)인 본격적인 전략수립보다는 그때 그 때 발생한 위기에 대해 대처할 사후 대응적(reactive)전략 수립이 중심이 되었다. 특히 파업이나 루머와 관련된 단편적인 위기관리기법이 도입되었다.

루머를 잠재우는 전략수립에서는 버네이스가 기여한 면이 하나있다. 루머발생시 '루머자체는 절대 그대로 반복하지 말라'(…never to repeat the rumor itself publicly)는 원칙을 버네이스가 제시하고 있다. 지금 현재 위기관리의 하나의 큰 원칙이 되어 응용되어있다. 실제 버네이스의 루머를 잠재우는 사례를 통해 더 자세히 관찰해 보자.

 

1930년 연말에 럭키스트라이크를 제조하는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가 유태인 세일즈맨 들을 해고했다는 루머가 돌아 아주 초보적인 위기관리를 버네이스에게 의뢰한다. 그 당시만 해도 위기관리가 하나의 PR전략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PR고객을 위해 부수적으로 제공한 서비스였다. 당시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그 루머는 아무 '인화성'이 높은 악성루머였다. 우선 버네이스는 그 루머가 '근거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위기관리 전략을 수립한다. 버네이스는 세일즈맨들을 회사의 '밀사'(emissary)로 유태인들이 경영하는 소매가게를 방문케하여 자연스럽게 위기관리 작업에 투입시킨다. 그때 시대상황은 미국의 모든 기업들은 디프레이션 때문에 큰 어려움에 처해있었고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뉴욕이나 주요도시의 담배소매가게는 유태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어 유태인 세일즈맨의 해고 루머는 치명적인 타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버네이스의 전략은 세일즈맨들이 직접 투입될 수 있게 그들에게 위기관리기법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유태인을 해고했다"는 루머 그 자체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유태인 세일즈맨이 영업부서에서 아무탈없이 잘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 루머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직․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버네이스가 세일즈맨들에게 지시한 1930년 12월 한 메모쪽지를 살펴보자. 세일즈맨들이 소매가게를 방문하여 그 가게의 분위기를 한번 살펴보고서 인사와 자기소개를 하는데 먼저 유태어로 해야할 지, 유태 억양의 영어 아니면 순수영어로 해야할 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이 서면 "안녕하십니까 저의 이름은 메르(Mehr)입니다. 사업은 어떠합니까?"로 시작을 한다. 여기서 메르라는 이름 자체가 유태이름이기에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에 유태인 세일즈맨이 모두 해고되었다는 루머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도 반응이 별로 시원치 않으면 유태말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우리 유태인 세일즈맨들은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에서 이처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에 불황 없이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곳이 담배회사입니다. 담배피우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살 수 없기에 우리 유태인들은 저처럼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에서 잘지내고 있죠." 라고 입소문을 낸다. 유태인 세일즈맨을 해고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없이 유태인 세일즈맨이 건재하다는 얘기만 꺼낸다. 여기까지에서 설득당하면 그 루머를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를 꺼내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별로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면 그 세일즈맨은 좀더 직설적으로 얘기를 꺼낸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 회사에 오래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고 사무 부서에는 많은 유태인 아가씨들도 있고 주문 부서에는 유태인 청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회사는 유태인 변호사 루이스 레비도 있고 유태인 광고담당자 알버트 라스커도 있고 그리고 많은 판매 요원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불룸버그도 있고 스틸버그도 있습니다." 불룸버그와 스틸버그까지 내려가면 그들이 모두 유태인 이름이기에 유태인이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에서 건재하며 해고되었다는 루머는 진실이 아닌 것이 입증될 수 있다.

버네이스는 유태인 상하의원협회를 포함한 영향력 있는 유태인 단체와도 긴밀히 접촉을 하고,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고위급 유태인에 대한 얘기도 흘리고, 아메리칸 토바코에서 큰 업적을 남긴 유태인에 대한 자료도 제공하면서 루머를 잠재우는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문적인 노력덕분에 루머가 시들어져가고 있을 때 그는 현재 위기관리 단계에서 말하는 '회복(recovery)'전략을 실시한다.

유태인 자선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또 유태인 상이용사들에게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를 보내어 마무리 작업을 하였다.

버네이스가 고안해낸 아주 초보적인 위기관리 기법이다. 지금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대단한 전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30년대에 버네이스가 고안해낸 위기관리기법을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이다.

 

부정적인 루머 발생시 현재 위기관리전략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으며 버네이스의 초기 원칙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a) 어떤 루머가 퍼져 있을 때 정확하고 완벽한 실제정보를 배포하여 그 루머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 루머가 더 이상 돌아다니기를 바라지 않기에 그 루머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뉴스보다는 부정적인 뉴스에 더욱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b) 하나의 루머가 돌아다닐 때는 먼저 그것을 분석하라. 그리고 그 진원지가 어딘지를 찾아보라. 왜 그런 것이 나오게 되었는지도 알아보라. 그리고 그 파장은 어느 정도 일 것 인지도 알아보라. 또 그것이 곧 사라질지 더욱 더 증폭될 것인지, 또 그 루머가 어느 한쪽을 특별히 겨냥한 것인지 또 그것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지 아니면 어떤 지방에 국한되어 있는 지 등을 자세히 알아보라.

 

c) 아무 대응 조치는 취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다.

때때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 그 루머를 부인하게 되면 밖으로부터 더 큰 관심을 끌게 된다. 보통의 루머는 곧 사라진다. 이 전략을 선택할 때는 아주 신중해야 한다. 1986년 유아용식품 회사인 거버사가 유아용 식품병에서 유리조각이 나왔다는 한 고객의 주장에 대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기로 전략을 세웠다. 이런 전략을 세울 때는 고객의 주장이 틀렸다는 100%자신이 있을 대만 가능하다. 거버는 자체 실험실 조사에서 유리조각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그리고 유리조각이 나왔다고 주장한 그 가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 유리조각은 분실되어 실제 유리조각을 찾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미국 식약청(FDA)은 40,000개 거버 유아용식품 병을 정밀 조사를 해봤으나 어떤 유리조각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거버사가 보유한 최첨단 장비는 1인치의 4/1000보다 더 큰 이물질은 모두 걸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자신만만하였다. 생산라인에서 뭔가 잘못된 것이 없는가 엑스레이도 찍어보았지만 병속에서 유리가 있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거버사는 그 루머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사실을 확인했다. 그 루머는 후에도 계속해서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그러나 거버사는 아무 대응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리콜하는 것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그 루머는 시들어졌고 거버제품의 판매는 원상을 회복한다. 그때 만약 리콜을 단행했더라면 그 루머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형식이 되어 효과적인 위기관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회사의 고위층들의 생각이었다. 무대응이 최상의 대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돈 버는 최상의 파트너 버네이스와 아메리칸 토바코의 힐사장

 

버네이스가 아메리칸 토바코사와 인연을 맺기 전 1927년 여름, 럭키스트라이크는 "럭키 스트라이크는 목을 편안하게 해주어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스타들이 즐겨 피운다.“라는 광고 캠페인으로 많은 관심과 럭키스타라이크의 담배 시장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 때 럭키 스트라이크의 경쟁사인 체스터필드(Chesterfields)라는 담배의 제조업체인 리겟 앤드 마이어스(Liggett & Myers)의 광고 대행사에서 럭키스트라이크의 광고 캠페인에 대항할 만 한 캠페인을 펼칠 사람은 버네이스 뿐이라 생각하고, 버네이스에게 체스터필드 담배의 PR을 의뢰했다.

 

버네이스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버네이스는 자기가 처음 PR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상한 제품(Damaged Goods)"이라는 연극을 프로모션 할 때와 마찬가지로 전위 그룹(front group)을 조직하여 이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었다. "상한 제품"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려했던 성병 매독(Syphilis)에 대한 연극이었고, 처음 대본이 나왔을 때 많은 파문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본을 연극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때 버네이스는 당시 유명 배우였던 리차드 베네트와 함께 "상한 제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추진했고, 전위 그룹인 "사회 기금조성 위원회 (Sociological Fund Committee)"를 조성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버네이스는 "흡연을 통하여 목을 맑게 하고, 맑고 편해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즐거움을 찾는다"라는 메시지를 광범위하게 전달하기 위해 각 주마다 ‘목소리 문화를 위한 담배협회‘(Tobacco Society for Voice Culture, TSVC)를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TSVC의 목적은 모든 가수들이 본인들의 목소리를 가꾸기 위해 흡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TSVC는 우선 담배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특히 음대, 치대, 웅변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TSVC 멥버쉽을 주기로 계획 했다. 버네이스는 자신이 결성한 조직인 TSVC의 법인 등록 허가가 나지 않았다. 뉴욕의 담당판사는 TSVC가 너무 저질적이라는 이유로 법인이 되는 것을 막았고, 버네이스는 계획대로 이 소식을 신문들에 보도되어 관심을 끌었다. 또한, 버네이스는 의 유익성 뉴저지주에서 TSVC 법인허가가 났을 때 감격하여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TSVC는 럭키 스트라이크의 유익성을 목이 쉬도록 증언하여 목이 갈라지는 가수와 상원의원등등의 보금자리가 되겠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 기념사를 재미있게 생각한 기자들은 럭키스트라이크를 경험으로 증언하는 연예인들을 풍자한 만화 등을 개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버네이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체스터필드의 경쟁사인 아메리칸 토바코의 힐사장은 바로 탐정을 통해 버네이스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하였고, 결국 버네이스에게 아메리칸 토바코사의 PR을 의뢰했다.

 

이렇게 만난 버네이스와 힐사장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8년간 아메리칸 토바코사를 위해 같이 일을 했다. 년간 약 $300,000(현재 가격으로 환산된 금액)의 수임료를 받고 있던 버네이스는 별 불만 없이 힐사장의 상업적이고 때로는 비양심적이며 불법적인 지시에 응했고 여러 편법을 이용하는 방법도 제시했다.

 

힐사장과 버네이스의 관계 중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은 힐사장은 버네이스 몰래 버네이스의 PR 경쟁자인 아이비 리(Ivy Lee)를 고용한 것이다. 물론 둘 다 그 사실을 몰랐다. 힐은 나중 "내가 버네이스와 아이비 리를 모두 데리고 있었던 이유는 나의 경쟁자들 (다른 담배 회사)이 이들을 고용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버네이스에게 둘을 같이 고용한 이유를 밝혔다. 그만큼 힐사장은 담배 업계의 최고의 자리를 위해 어떠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버네이스는 나중에 "힐은 야만적이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이다. 그는 담배시장을 전쟁으로 생각하고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라고 밝혔지만 그의 시장을 내다보는 능력은 인정하였다.

 

비록 힐사장이 7살이 더 많았지만 둘은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둘 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보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자신의 업계에선 최고라고 자부했고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기를 좋아했다. 둘은 친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버네이스의 천재적인 프로모션은 힐사장의 럭키스트라이크가 그 어느 담배 브랜드가 따를 수 없을 만큼 자리매김 하게 했고, 또한 힐사장에게 많은 돈을 안겨주었다. 또한 힐사장은 버네이스가 제안한 PR 캠페인들이 아무리 예산이 많이 들고 터무니 없어도 모두 받아드렸고 업계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버네이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마, 지금 그 어느 클라이언트라도 프로젝트를 위해 심리학자를 찾아갈 수 있는 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계획했던 5번가에서의 퍼레이드 즉, 자유의 횃불 캠페인 또한,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계획했던 아이디어는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크고 말도 안된 다고 여겼을 것이다." 라고 밝히듯이 힐사장은 버네이스의 허황된 계획조차도 전적으로 믿고, 버네이스의 계획을 지원 했다. 럭키스트라이크가 경쟁업체인 카멜, 체스터필드 보다 항상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것 또한 힐사장과 버네이스의 파트너쉽이 기인하였다.

 

또한 버네이스는 담배회사들을 위해 여러 방법의 MPR기법으로 시민들이 담배를 피우도록 권유했지만, 정작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도, 담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안티 스위트 캠페인을 계획했던 버네이스 본인은 "난 담배의 이상한 냄새보다 달콤하고 맛 좋은 초콜렛이 더 좋다" 라고 했다.

 

 

5. 버네이스의 돈버는 비결은?

 

(1) Big Think(큰사고)

 

버네이스의 성공의 비결은 창의적인, 보다 "큰 사고(Big Think)"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마케팅 활동은 경쟁회사의 시장점유율을 뺏는데 초점이 맞춰지지만 버네이스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당설하기 위해 버네이스는 남들보다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훨씬 더 큰 효과를 거두었다. 고차원적 개념의 언론 홍보용 행사를 만들었고 제 3자 인증 방식을 사용했으며 설문조사 및 기타 자료를 활용했다. 버네이스는 종종 "오늘날과 같은 매스커뮤니케이션 시대에 겸손은 사적으로는 미덕이지만 공적으로는 결함이다“라고 말함으로 보다 적극적인 PR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Father of Spin(1988)의 저자 레리 타이(Larry Tye)는 Big Think에 관해 "버네이스는 원래 제품 판매 촉진을 위해 고용되었지만, 대신 그는 전혀 새로운 행동양식을 제시했다"라고 기술하며, 자신의 고객이 경쟁사와 비교시 얼마나 더 높은 혹은 낮은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편협하고 수직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더 넓은 경제 및 사회에서 고객의 현재 위치 및 미래의 가능성을 파악하는 전략적이고도 광범위한, 수평적 사고방식을 버네이스가 소유했음을 밝혔다.

 

Big Think의 좀 더 어려운 표현으로 버네이스는 또한 "우회적 호소"(Appeals of Indirection)라는 문구를 즐겨 사용하는데, 클라이언트의 목표치에 도달하기 위해 우회적인 방법이 표면적으로 볼 때는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직접적인 접근을 했을 때 야기되는 장애물들을 피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성 담배 흡연을 촉진하기 위해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이라는 슬로건을 도입하였다.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떳떳이 담배피우는 것은 남성들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며 여권신장운동이라는 것이다. 이 캠페인을 통해 미국의 주요 극장에서 여성 흡연실이 생기고 여성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떳떳이 담배를 피우게 된다. 버네이스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버네이스가 너무 우회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여성해방운동까지 연결이 되어 여성시장 공략이라는 노다지 하나를 고객에게 안겨줘 그의 고객을 감동 시키게 까지 만들었다.

 

그의 제안서들은 클라이언트를 처음엔 당황하게 했으나 곧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경쟁자들보다 더 영리하고 자신감이 강했던 버네이스는 하나의 이슈에 관해 항상 큰 컨셉을 잡았고 어떻게 보면 무모할 수도 있는 대담하고 큰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렇듯 큰 그림을 보고 전략을 세우는 버네이스는 관습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PR을 통해 현실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버네이스는 캠페인을 실행할 때 항상 세가지 절차를 따랐다. 첫째, 언론이 관심을 가질만한 "공공연한 행동(overt act)"을 만들어냈다. 둘째, 타켓층을 특성에 따라 세분(segmenting)하고 분석하여 그들을 직접 설득해 가는 캠페인을 실행했다. 마지막으로 "프론트 그룹“ 즉 전위조직을 내세워 PR의 주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간접적으로 캠페인을 실행토록 유도했다.

 

(2) 고객의 사장, 부사장만 상대하다

 

버네이스는 당돌하였다. 고객의 실무자들과는 전혀 접촉을 하지 않고 한 조직이나 기업의 No.1 아니면 No.2인사만 상대하였다. “정책결정은 사장, 부사장이하의 계단(ladder)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설사 실무자들이 일년에 100,000달러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요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항상 Top을 상대하였다.” 이런 경우 사장, 부사장을 보좌하는 실무진들의 눈치를 많이 봐야하고 또 업무추진 중 생각지도 못한 쿳션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버네이스처럼 사장, 부사장의 신뢰가 돈독하고 고객이 그들의 진정한 필요에 의해 버네이스를 접촉했을 때 그러한 ‘오만함’이 통하는 것이다. 또 버네이스의 청구금액은 항상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그는 나중에 고백하기를 “돈을 많이 받음으로써 그의 전략이 가치가 있으며 고객의 최고경영자에 맞먹는 돈을 받기에 내가 함께 전략을 논의할 대상이 바로 사자이나 부사장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했다.

 

(3) 세심한 실행과 정보 보관

 

우리주위에서 섬세한 사람은 큰일을 할 수 없다는 얘기가 있지만 "Big Thinker"였던 버네이스는 섬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을 때 "Big Think"가 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재의 뒤에는 항상 수많은 일화가 있는 법이다. 그의 연설문을 타이핑한 비서가 'public'을 'pubic'라고 오타를 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러나 실제 그 원고를 작성한 사람이 'public'을 'pubic'라고 실수한 것이었고 그 비서는 원문대로 정확히 타이핑을 했다는 것이다. 버네이스의 회사 직원 중 나중에 카톨릭 신부가 된 짐 칼드웰은 자료실에서 잠깐 잠을 잤다는 이유로 해고되었으며 또 버네이스의 조카였으며 회사관리 책임을 맡은 위너의 비서가 버네이스의 새로 옮긴 아파트로 차를 타고와서 융단과 커텐의 크기를 자로 측정하라는 말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몇가지 사례들은 한번의 경고로 그냥 넘어 갈 수도 있겠으나 버네이스는 완벽주의자였다. 그의 그러한 완벽주의가 고객을 감동시키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쉐리 네덜란드 호텔 PR을 맡은 그는 플라자, 리츠칼든 등 맨해튼 최고급 호텔과 서비스를 비교하기 위해 현장조사를 지시했다. 현장조사를 통해 각 객실의 재떨이가 깨끗한지, 얼음물이 비치되어 있는지, 명암 조절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등가장 작은 부분까지 점검했다. 버네이스는 직접 특실 카니발룸을 둘러보고 잘못된 점들을 일일이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객실 담당자들의 옷은 구겨져서 산뜻한 느낌이 들지 않고 식탁에 앉으면 보이는 부엌의 식품보관대는 완벽하게 청결한 상태가 아니고 수석웨이터는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고 지적했다.

 

또 "빨간색 식품 보관대를 전체 분위기에 맞춰 줄무늬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도 했으며 음식에 대해서는 "내 아내는 거의 다 식은 생선요리를, 나는 뜨겁지 않고 그저 따뜻한 쇠고기 요리를 먹었다"고 하면서 아주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호텔 산업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세밀한 자료는 모두 카드에 기록․보관되었으며 수만 개의 카드는 서랍에 잘 보관되어 버네이스나 그의 직원이 주소나 전화번호, 간단한 사실 확인이나 아이디어등이 필요할 때면 언제고 참조할 수 있었다. 작은 사실과 지혜는 간단한 정리와 보관습관에 의해 축적되었고 그 바탕위에 결국 크고 전략적인 사고(Big Think)를 이루게 되었다.

 

(4) 클라이언트를 위한 최선의 방법 선택

 

버네이스에게 과감한 전략적 사고를 실행함에 있어 세심한 실행방식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행동 원리가 있다면 클라이언트를 위해서 극단적 방법까지 마다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1933년 버네이스는 얼라이드케미컬(Allied Chemical)을 도와 주주들이 기업 재무 정보를 공개하라는 압력에 대항했다. 그는 클라이언트를 돕기 위해 주주들이 벨기에 출신이며 이는 '외국 자본의 지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러한 전략은 그에게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버네이스는 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 태생이라는 이유로 미국에 대한 본인의 애국심을 의심받자 매우 분노한 바 있었다. 이러한 면모는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해서 미국내 미디어 전문지 에디터앤퍼블리셔(Editor and Publisher)는 그를 '우리시대의 마키아 벨리'라 했다. 또 펠릭스 프랑크 퍼터 대법원 판사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버네이스 및 버네이스와 더불어 당대 PR계를 대표했던 아이비 리를 "전문적으로 대중의 마음에 독을 붓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버네이스는 말년에 PR이 하나의 존경받는 전문직종으로 사회에서 인증받게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나는 내 일생의 많은 부분을 PR전문직 인증을 얻어 내는 데에 보냈다"고 회고했다.

버네이스는 수년간, PR이 전문직으로 인증받고, PR인들을 전문가적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92년 버네이스가 100세였을 때 PR활동이 전문직으로 등록되고 사회적인 인증을 받을 법안을 냈지만 통과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버네이스는 이 캠페인이 끝나기 전에 사망했다.

 

 

6. G.E.를 미국최고의 기업으로

 

1929년 10월 에디슨의 전기 발명 50주년을 기념하는 '빛의 황금 축제'(Light's Golden Jubilee)는 버네이스의 대표적 성공 사례이자 PR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뛰어난 행사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행사의 이름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은 구약성경의 창세기중 천지 창조의 처음에 나오는 '빛'(Light)과 모든 사람이 원하는 황금(Gold) 그리고 경축(Jubilee)의 3가지다. 버네이스는 행사를 가장 화려하고 훌륭한 세기의 축제로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 끝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름은 단어의 의미론적 측면에서 압도적이고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이 행사를 맡았을 때 버네이스는 매우 많은 고객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의 판매 신장을 위한 여성 소비자 공략, 까르띠에(Cartier) 보석의 제품배치 (Product Placement:PPL), 다지(Dodge)사의 빅토리식스(Victory Six) 자동차, 낙스(Knox)의 젤라틴, 뉴저지벨(New Jersey Bell)의 새 전화 서비스 등 다양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일 그가 기술했듯 "당시 많은 이들에게 PR 종사자들은 여전히 선정적이고 즉흥적인 깜짝쑈(stunt)를 하는 사람들로, 언론과 기업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존재 정도로 저평가되고 있었다." 그는 '빛의 금혼식'이야말로 PR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버네이스는 에디슨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때는 미증시 폭락 전으로, 과학문명의 발달과 경제적 번영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믿는 낙관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버네이스는 후에 "이 행사를 기획함으로써 80대 고령의 발명가 에디슨을 워싱톤이나 제퍼슨, 링컨 같은 미국 위인들과 같은 위치에 자리를 잡도록 하고, 더 나아가 그를 신격화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당시 행사의 공식 후원자로는 GE(General Electric)와 포드자동차의 설립자 헨리 포드가 거론되었다. 결국 후원자로 소년시절부터 에디슨을 흠모했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거부 헨리 포드가 결정되었다. 에디슨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따라서 행사는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했고 GE본부가 있는 뉴저지주가 아닌 미시간주 디어본(Dearborn)에서 열리게 되었다. GE는 주후원자는 아니었으나, 행사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다. 헨리포드는 공식 후원자로 300,000달러를 내놓은 것이다. GE는 이 행사를 위해 그해 5월 버네이스를 고용하여 자사의 이미지를 높이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버네이스가 행사 준비에 관계하게 되면서, 퍼블리시티 공세를 비롯한 PR캠페인이 즉각적으로 전개됐다. 버네이스는 후버 대통령이 행사준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게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로 인해 캠페인은 더욱 힘을 받았다. 버네이스는 PR캠페인의 성공을 위해 거부 헨리 포드의 지원하에 유명인사나 정부기관, 외국과의 협조를 얻어냈다. 버네이스의 지시에 따라 전국에서 행사준비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행사일이 휴일로 지정되었으며, 전 세계의 전기가 1분 동안 꺼졌다가 켜졌다. 유명 인사의 연설이나 체신부의 특별 우표 발행 뒤에도 그가 있었다. 버네이스는 기념우표 발행을 위해 체신부 장관을 만나 설득에 성공했다.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가였고 그만한 존경을 받아 마땅했지만 이 행사가 현실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PR인 버네이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빛의 황금 축제 행사를 앞두고 언론은 버네이스가 고객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에디터앤퍼블리셔지는 "버네이스가 지난 봄부터 '빛의 황금축제' 행사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그를 고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가 나간 뒤 5일 후까지 언론은 버네이스의 클라이언트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가 언론에 보낸 자료들은 전기나 전력 산업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포드 관련업체나 GE, 웨스팅하우스, 에디슨 램프 중 한 업체가 그를 고용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들 모두가 협조하여 버네이스를 고용한 것일 수도 있다". 버네이스는 사람들이 이 축하 행사가 GE 혹은 다른 업체에 의해 주도 면밀하게 기획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처럼 보여 극적 효과를 노리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어느 회사가 그의 클라이언트이냐를 묻는 질문에 "우리는 변호사나 의사와 마찬가지로 클라이언트의 비밀을 보장한다"고 답해 언론의 궁금증을 부채질하면서 버네이스 자신은 물론이고 주후원자로 선정되지 못했던 GE가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에디슨은 전기의 발명을 기념하는 이 행사가 상업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바 있었고 이는 GE가 아닌 포드가 주후원자로 선정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버네이스는 기념행사 6개월 전부터 발명왕 에디슨과 전기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후버 대통령이나 헨리 포드의 이름으로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언론들은 50년 전 에디슨의 전기 발명에 대해 수많은 기사들을 게재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존 J. 퍼싱과 같은 유명인사들이 축하 서신을 보내왔다. 조지 M. 코핸은 '에디슨-기적의 인간(Edison-Miracle Man)'이라는 노래를 작곡했으며, 남극탐험가 리차드 버드 장군은 남극의 등대에 에디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국 전역은 곧 축하행사 열기로 들끓었고 각 도시는 에디슨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기획했다. 뉴햄프셔와 뉴멕시코 등 미국 각 주 뿐 아니라 캐나다와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도 전기의 발명을 기리는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행사 일주일 전인 1929년 10월15일 동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도 빛의 황금 축제가 열렸다. 노스캐롤라이나주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University of North Carolina)의 연례 졸업생 모임과 무역박람회에 맞춰 시기를 조정한 것이다. 이 행사에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뉴욕주 주지사가 기조 연설을 했다. 루즈벨트는 그의 연설중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기 전 등유로 불을 밝히는 생활을 하던 시절을 회고헸다. 그는 에디슨의 발명은 인류에 편의와 위생적 환경을 주었을 뿐 아니라 삶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이 미국전역은 빛의 황금 축제를 전후하여 온통 빛의 축제 열기로 달아올라 각 지역에 맞는 행사들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열기 뒤에는 물론 버네이스의 전략과 과감한 실행력이 있었던 것이다. 연방체신국은 빛을 발하고 있는 에디슨의 램프를 인쇄한 2센트짜리 빨간 우표를 발행했다. 행사일 이전에 GE의 본부가 있는 뉴저지주에서는 '다이아몬드 축제(Diamond Jubilee)'와 같은 축소판 행사를 여러 차례 열렸다.

 

1929년10월21일 열렸던 행사에는 허버트 후버 대통령, 마리 퀴리, 록펠러 쥬니어, 비행기를 발명한 오빌 라이트, J.P 모건 등 당대 저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또 미국 주요 일간지와 통신사, 주간지, 사진기자 등이 초대됐다. 버네이스는 어떤 의미에서 이날 행사의 중심 인물이었던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대통령은 기차역사 밖에서 귀빈과 측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도 행사장을 정리하고 있지 않아 내가 군중들을 밀치고 들어섰다. 내가 '일렬로 서서 질서 정연하게 대통령을 맞자'고 말했고 나는 각 참석자들의 이름을 물은 후 대통령께 말씀드렸다."

 

후버 대통령과 영부인은 이날 열린 퍼레이드에서 추운 날씨에도 컨버터블 자동차의 톱을 열고 디트로이트를 출발해 디어본에 도착했다. 이 퍼레이드에는 1백 만명 이상이 운집해 세기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헨리 포드가 에디슨을 기념하여 기부한 '그린필드 빌리지와 에디슨 회관' 개관식이 진행되었고, 정오쯤 본 행사가 시작됐다.

 

이날 저녁 헨리 포드가 미시간주에 옮겨 재건축한 에디슨의 뉴저지 실험실 이층에 82세의 에디슨이 나타나면서 행사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전 세계의 전기 회사들은 빛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된 절차에 따라 일 분간 전기를 끊었다. 칠흑같이 깜깜한 가운데 에디슨은 유명 인사들에 둘러싸여 본인이 50년 전 발명했던 전구를 앞에 두고 발명의 역사적 순간을 재연했다. 미국의 TV 방송 NBC는 전세계 수백만 청취자들에게 "전구가 켜질까요? 아니면 타버릴 까요?"라며 조바심을 자아냈다. 앵커는 "전구가 깜빡이다 꺼져버리지 않을까요? 실험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에디슨은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철사 두 개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제 그 전등으로 다가갑니다. 연결하고 있습니다. 전구가 켜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앵커는 창세기 구절을 연상케 하며 "에디슨이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고 말했다'고 했다. 이어 전국에서 전등이 일제히 켜졌다.

 

82세의 에디슨은 자신의 빛의 발명을 재연한 후 기진맥진했다. 가까운 방으로 옮겨진 에디슨은 소파에 누워 약을 먹은 후 헨리 포드의 집으로 옮겨져 수일간 휴식을 취했다. 이 대목에서 행사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신체가 쇠약해진 고령의 발명가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버네이스의 비정한 프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에디슨은 기진맥진한 채로 누워 있었지만 행사장은 축제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었다.

 

버네이스는 미시간에서 빛의 금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클라이언트인 GE 본부가 있는 뉴저지주에 있는 에디슨의 실험실에서는 미48개 주에서 초대된 영재 소년들이 묵으며 일주일간 에디슨과 코닥사 창립자 이스트맨, 포드 등 20세기 과학 문명의 창시자들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이는 '빛의 금혼식'과 함께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다. 초청된 소년들은 일주일을 뉴저지에서 보내며 전기회사들이 총명한 젊은이들이 인류, 혹은 소비자를 위해 더욱 더 많은 발명을 하기를 희망한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전달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 내이션(Nation)지는 "이러한 초유의 PR 전략은 물론 버네이스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의 경쟁자 아이비 리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더욱 많이 고심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뉴요커(New Yorker)지도 내이션지에 동의하고 있다. 뉴요커는 "버네이스는 백만장자들과 훌륭하게 손을 잡았다. 버네이스는 포드의 지원 하에 수많은 유명인사들을 끌어들였다. 그의 지휘봉에 따라 메인에서 하와이 호놀룰루까지 준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수많은 연설이 준비되었고,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내이션(Nation)지는 1929년 하버드 광고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우정성이 에디슨 전구 발명 5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하도록 만든 'PR인 버네이스'라고 극찬했다. 월간 아틀랜틱(The Atlantic Monthly)지는 "헨리 포드가 이 행사의 진두지휘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행사의 무대를 만들고 저명 인사들을 움직인 것은 바로 이날을 위해 3백만 달러를 쓴 헨리 포드가 아니라 에드워드 버네이스"라고 언급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자 레오나드 두브(Leonard Doob)는 '빛의 황금 축제'중 버네이스의 활약상에 대해 '전쟁이 아닌 평상시에 이루어진 가장 눈부신 프로파겐다'라고 평가했다. 에디슨은 기념일 행사 후 "당신의 배려와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친필 편지를 보내왔다.

 

빛의 황금 축제 캠페인은 버네이스가 미 국회도서관에 기증한 자신의 업무 자료 중 다섯 상자를 차지하고 있어 그의 치열한 노력을 보여준다. '빛의 황금 축제'는 그의 크고 전략적인 사고와 치밀한 실행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웨스팅하우스나 에디슨 램프 등 전력공급 업체인GE의 경쟁자들과의 관계 촛점을 맞추지 않고, 전기의 발명을 기념하는 행사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클라이언트를 포함한 전기 산업에 최대의 이익을 가져오도록 했다. 즉 정해진 파이를 두고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이 아니라 파이를 키우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버네이스는 행사가 전기가 발명된 뉴저지주 앞마당에서 미시간으로 옮겨졌음에도 자신의 클라이언트였던 GE에게 최대한 유리하도록 다이아몬드 축제와 영재 소년 초청 행사 등을 GE의 본사가 있는 뉴저지주에서 열기도 했다. 이 행사를 위해 포드는 3백만 달러를 지출했으나, 결과적으로 GE 등 전력공급 업체가 행사의 가장 큰 수혜자로 평가된다. 공중은 상업용 메시지라고 판단되면 거부감을 느낀다.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 공중에게 거부감을 주는 광고에 대한 새로운 IMC나 MPR같은 개념들이 등장을 했고, 버네이스는 오래전부터 그것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버네이스는 인터뷰 중 '빛의 황금 축제'를 본인이 이룬 '가장 큰 승리'라고 말하였다. 당시 언론은 이 화려한 국제적인 미디어 행사를 기획, 실행한 데 대해 버네이스에게 찬사를 보냈으며, 이 행사는 PR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전략적 접근과 치밀한 실행을 통해 클라이언트에게 최대의 수확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자신의 업인 PR의 승리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영웅들의 대화: 발명왕 에디슨과 자동차 왕 포드

 

행사일 점심식사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헤드테이블에는 에디슨과 헨리 포드가 나란히 앉았다. 그들은 버네이스에게도 헤드테이블에 오도록 했으며, 버네이스는 스스로 상석에 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의 요구가 워낙 완강해서 상석에 가게 되었으나 그들과 어울려 이야기 하기 보다 식사 중 두 영웅들의 대화를 듣기만 하기로 하고 자리에 앉았다. 포드는 그의 청소년 시절의 우상이었던 에디슨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데 흥분해있었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에 손을 대고 청력이 약해진 에디슨에게 큰 목소리로 "참 건강해 보이십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에디슨은 "집사람이 매일 간장약을 챙겨주고 있어 좋아진 것 같소"라고 답했다. 포드는 "몇 알씩이나 드십니까?"라 물었고, 에디슨은 "하루 다섯알씩 먹습니다"라 말했다. 버네이스는 이날 만찬을 회고하며 "영웅들의 대화는 알약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들의 지혜를 얻으려면 차라리 공공 도서관에 가서 이들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두 영웅들의 대화는 그들의 업적에 맞먹는 세상을 뒤바꿀 만한 수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간장약 수준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버네이스의 회고는 두 영웅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한다. 두 국가간의 정상회담을 통역한 어느 외교관은 정상회담의 많은 부분이 아주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대화에 사용되고 공동성명에 포함된 주요 내용은 미리 외무장관사이에 거의 확정되기 때문에 정상회담에서 다루는 부분은 아주 적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들의 업적이 담겨있는 수많은 책이 쌓여있는 ‘도서관 수준’으로 옮긴 것에서도 버네이스의 위대한 PR인의 면모를 접하게 된다.

 

 

7. 미국인들의 인식 변화에 도전한 ‘발레’프로모션

 

버네이스는 1915년 미국인들에게 러시아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러시아의 '발레 뤼스' (Ballet Russe:러시아 발레단이란 뜻)의 미국 내 공연을 성공시키기 위한 PR업무를 맡았다. 당시 미국인은 발레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으며, 더구나 발레가 고급 엘리트들의 예술 장르로서 번창했던 러시아에 대해서는 더욱 더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레 뤼스에 대한 홍보를 맡는 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버네이스는 발레 뤼스의 진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었기에 반드시 미국에서도 발레 뤼스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

 

 

 

버네이스가 발레 뤼스의 미국내 공연의 홍보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했을까? 먼저 발레 뤼스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발레 뤼스는 러시아의 탁월한 공연 예술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lilev)가 1909년 창단한 발레단으로 현대 발레의 주역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발레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발레 뤼스는 발레의 본고장인 파리 등 유럽에서도 창의적인 발레로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발레 뤼스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뤼스가 있었기에 디아길레프가 있었고, 디아길레프가 있었기에 발레 뤼스가 명성을 날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디아길레프는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러시아 제국 극장(Imperial Russian Theater)에서 경험을 쌓은 디아길레프는 고전 발레와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의 현대 무용을 결합시켰다. 그가 발레 뤼스의 명맥을 유지하며 유럽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천재적인 안무, 예술적인 디자인과, 칼사비나, 파블로바, 니진스키 같은 러시아 무용수들의 탁월한 기술과 표현력 때문이었다. 음악, 무대 장식, 색상, 의상, 조명, 이야기 구조의 독특한 활용으로 관객들을 압도했다. 발레 뤼스에 대해 유럽 전역에서 열광적인 찬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바로 1915년 여름에 이르러, 발레 뤼스는 다음해 일월에 미국에서의 데뷔 공연을 올릴 것이라는 발표를 내놓았다.

 

당시 미국은 유럽 문화에 대해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물론 러시아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데다, '실내화'와 '타이츠'를 걸치고 무대에서 춤추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발레 뤼스를 홍보하는 일은 스물세 살의 버네이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버네이스는 바로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멋지게 성공하여 그의 명성을 다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철저한 사전조사와 분석

 

버네이스가 발레 뤼스의 홍보를 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발레에 대한 공부였다. 자신 역시 자신이 계몽하고자 하는 대중과 마찬가지로 발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발레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발레에 대해서 그리고 발레 뤼스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과 중고 서점을 뒤졌으며 발레 뤼스의 미국 내 순회 공연을 후원하기로 되어있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컴퍼니(Metropolitan Opera Company)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입수했다. 또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Literary Digest)>>의 예술 담당 편집자인 프레드 A. 킹(Fred A. King)과 신예 발레리나 나타샤 램보바(Natasha Rambova)로부터 발레에 대한 철학까지도 배우는 철저함을 보였다. 일반인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전 준비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여론 조사'와 같은 일련의 조사활동을 통해서 홍보를 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하지만, 1915년에 버네이스가 실시한 조사는 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그들이 발레를 어떻게 생각하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경험에 근거한 추측을 이끌어내는 작업수준이었지만 그의 활동은 대단히 전략적이었다.

 

언론이 필요로 하는 프레스 킷 작성

 

발레에 대해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점이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점, 오해하고 있는 점들을 대략적으로 확인한 버네이스는 대중을 계몽하고 그 태도를 바꾸기 위한 홍보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그가 언론용으로 준비한 자료에는 당시 발레에 대해서 회의적인 언론 편집자들이 발레단에 관심을 가지도록 사용했던 창의적인 관점들이 잘 나타나 있다. 예를들면 그 자료에는 발레 뤼스의 주임 무용수로서 유럽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니진스키에 대한 기본적인 약력 (sketch of Nijinsky's life)외에도 '니진스키의 장모, 사위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우다 (Nijinsky's mother-in-law brands him a spy)','미국 남성들은 우아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가? (Are American Men Ashamed of Being Graceful?)', '브로드웨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무용수를 몰라보다 (World's Greatest Dancer Walks Broadway Unnoticed)', '발레의 꿈을 현실로 (Dreaming a Ballet Into Being)','아내를 기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 (Nothing Like a Stencil To Keep My Lady Warm)', '발레 소녀의 삶 (Life of Ballet Girl)', '발레 뤼스를 한데 모아주는 것은 바로 안전핀 (It's Safety Pins that Keeps the Ballet Russe Together)', 유행, 장신구, 그리고 현대 의상에 발레가 끼친 영향에 대한 기사" 등이 포함되었다. 버네이스는 발레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 자료와 화제의 무용수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거리와 문화생활로서 발레의 유용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사화 자료를 준비하는 치밀함과 기획력을 발휘했다. 프레스 킷에 준비된 하나하나의 소재들이 그대로 기사화 되어도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왕성한 기고 활동

 

버네이스는 신문 및 잡지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PR의 목표를 달성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버네이스는 독자들이 발레단의 홍보 담당자가 썼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발레단을 홍보하는 기사가 게재되도록 하여 일반인들이 자연스럽게 발레에 대한 이해를 넓히도록 작용했다. 또한 보수적인 당시 사회분위기로 인해 무용수가 무릎위로 올라간 발레 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독자들이 보고 불쾌해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신문과 잡지들이 발레 홍보 사진들을 게재하지 않을 수 도 있었다. 버네이스는 다시 '레이디즈 홈 저널'(Ladies Home Journal)' 등 주요 신문과 잡지에서의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거금 $600을 들여 화가 두 명을 고용해서 발레리나의 스커트 길이를 늘렸다. 이 사진은 두 쪽짜리 컬러 광고에 실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수백만의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스타를 이용한 MPR의 귀재

 

버네이스는 이국적이며 긴장감이 넘치는 작품이었던 '세헤라자(Scheheraza-de)'에서 주역을 맡은 발레리나 '플로레스 레발레스'에게 언론의 관심을 끌어보기로 했다. 문화 공연물에서 주연의 역할은 항상 주목을 받고, 관객뿐 아니라 일반인의 관심을 끌어 공연을 보러 오게 하기 때문이다. 버네이스는 플로레스 레발레스를 화제 인물로 만들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기자회견장에는 '모닝 텔레그라프(Morning Telegraph)' 만이 모습을 나타났다. 버네이스는 기자회견이 무산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버네이스는 포기하지 않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시도를 기획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파격적인 것이었다. 꽃술 장식이 달린 꽉 끼는 드레스를 입은 레발레스가 브롱스 동물원(Bronx Zoo)에서 위험하지 않은, 기다란 사육 뱀을 두르고 있는 사진을 찍었다. 이 흥미로운 사진에는 "레발레스는 코브라를 선택했지만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 때문에 코브라가 유순하게 되었다"는, 그리고 "브롱스 공원(Bronx Park)에서 파충류의 물결치는 듯한 움직임을 감상하고 있는 레발레스의 모습을 거의 매일 볼 수 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이 사진 보도자료는 전국의 신문과 잡지에 배포되었다.

 

신문들은 그 기사를 일면으로 다루었다. 버네이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애완용 뱀을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여행할 때마다 데리고 다니라고 레발레스에게 권했죠." 그는 이렇게 그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곧 동의하더군요. 연예계 종사자들은 이름을 알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한답니다. 레발레스가 얼마나 쉽게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어가는지를 지켜보면서 한 사람의 평판이 현실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허상뿐인지를 확실히 알기 위해선 그 이면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대중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모습은 아무런 연관이 없죠. 뱀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가 없었다면, 플로레스 레발레스가 비록 매력적이고 자극적이며 재능있는 여성이긴 해도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까지는 몇 년을 기다려야 했을 거예요. 뱀이 그런 시간을 줄여주었죠."

 

버네이스의 회고는 이렇게 이어졌다.

이렇듯 스타를 띄우기 위한 이벤트는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메리 픽퍼드(Mary Pickford), 노마 탤미지(Norma Talmadge)와 같은 유명한 영화 배우의 홍보를 담당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버네이스 이러한 스타 알리기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재능을 지녔다. 버네이스가 실행한 전략은 당시나 후대에도 신화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눈에 띄는 것이었으며 그는 항상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새로운 고객들로부터 배우고 그들과 함께 성장하였다. 그리고, 언론 보도가 발레단을 홍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발레 뤼스의 무대 장치와 의상의 색상과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제품을 생산하도록 장신구, 핸드백, 램프 갓, 식탁보 및 냅킨류 등의 제조업체를 부추겨 발레 뤼스의 영향이 생활속에 파고들어 가도록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발레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방법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상에서 PPL을 활용함으로써 거두는 홍보 전략으로 인기를 끌고 있음을 볼 때 버네이스의 시도는 시대를 앞선 대단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난관도 긍정적 '자극제'로 인식

 

발레 뤼스를 미국내에 알리는데 뜻밖의 장애물이란 있게 마련이었고 그 중 몇몇은 순회 공연의 성사를 위협할 만큼 심각했다. 발레단에서 가장 중요한 홍보 대상이었던 니진스키는 헝가리에서 적성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첫 시즌 전체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풀려났을 때에는 발목을 삐는 바람에 뒤이은 공연 대부분에서도 빠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출신의 지휘자 피에르 몽퇴(Pierre Monteux) 역시 처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경우는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순회 공연에 나선 사람들 모두가 다른 사람과 낭만적으로 뒤얽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버네이스에 따르면 그러한 관계들 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웠던 것은 디아길레프와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연인이었던 니진스키, 니진스키의 아내 로몰라(Romola), 그리고 디아길레프의 새 애인으로 첫 번째 미국 순회 공연 때 니진스키를 대신했던 레오니드 마신(Leonide Massine)이 관련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50년 뒤, 버네이스는 발레단과 함께 한 삼 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인생에 대해서 그 때 이후로 정치와 책, 로맨스, 결혼, 그리고 아버지가 됨으로써 배우게 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회고했다. "하나의 조직에 속한 구성원 개개인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복잡하게 뒤얽힌 채, 중세적인 음모와 불륜,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 열정과 공격성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했었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것을 자극적인 업무의 한 부분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고 난관조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였다.

 

버네이스의 발레 뤼스 홍보 평가

 

클리블랜드 관현악단(Cleveland Symphony Orchestra)의 창립 이사인 에이덜라 휴스(Adella Hughes)는 발레 뤼스가 중서부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버네이스의 홍보 방법을 관찰하였다. 그녀는 1947년의 자서전 '음악은 나의 인생(Music Is My Life)'에서 "홍보와 선전이라는 측면에서 이보다 더 잘 준비된 기획은 일찍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사람들은 이 일을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손에 맡겨 놓았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다른 어떤 조직에서 만들어낸 것도 버네이스의 사무실에서 나온 홍보용 자료의 가치와 질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뉴욕 드라마틱 미러(New York Dramatic Mirror)'지도 1915년 12월 4일자의 기사에서 이에 동의하였다. "여러 잡지의 최근호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축사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의 언론 담당 대리인인 에드워드 버네이스에게 돌아가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위기의 시대에 단순한 연예 단체가 이만큼의 명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카르사비나(Karsavina), 니진스키, 본(Bohn), 그리고 이 유명한 단체의 다른 주요 단원들에 대한, 사진이 곁들여진 기사가 실리지 않는 잡지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고 버네이스의 공로를 찬양했다. 언론이 홍보전문가의 활약에 이 정도로 평가했다는 당시 버네이스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레 뤼스의 미국내 공연 성공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버네이스만이 아니었다.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을 보며 파안대소하거나 발을 높이 들어올리며 춤을 추는 지그펠트 걸(Ziegfeld girls)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미국인들이 이제 그보다 세련되고 확실히 유럽적인 오락에 끌리는 스스로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전국이 발레단 얘기를 하고 있었다"고 버네이스는 기록했다. "발레단은 미국의 무용을 해방시킴은 물론 그것을 통해 미국의 정신까지 해방시켰다. 성에 대해 보다 관대한 태도를 유도하였으며, 우리의 음악과 그에 대한 평가를 변화시켰다. 발레 대본은 현대 예술을 보다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색상이 새로운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에서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전환점이 되었다."고 그는 발레 뤼스가 문화와 유행에 미친 영향을 평가했다.

 

 

- 탁월한 카피라이터 버네이스 -

 

버네이스의 천재성은 여러사례에서도 볼수 있지만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감각적인 통찰력과 남다른 비상한 독창성과 탁월한 어휘구사능력에 기인한다.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창안한 이벤트 캠페인들이 업계에서 응용되고 있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는 카피라이팅 능력이다. 단어를 완전히 마스터한 사람에게만 나올 수 있는 창의력이며 PR과 광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갈고 닦아야 할 분야이다. 언어의 마술사가 버네이스의 ‘자유의 횃불’이라는 카피는 그의 여러 가지 업적 중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버네이스는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던 시절 그러한 관습을 깰 수 있는 전략을 부탁 받고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이라는 슬로건 제목을 하나 만들어 내었다.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여권운동과 결부시켜 여자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담배피우는 것에 대해 비난을 하면 여권신장운동에 도전하는 사람으로 연결시켜 아메리칸 토바코사가 노다지 하나를 쉽게 찾게 도와주었다. 자유의 횃불의 ‘torch’는 담배 피울 때 앞부분에 불이 타들어 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여권신장의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또 미국인들이 단음식(sweets)을 후식으로 좋아하는 경향에 도전하여 담배를 디저트의 메뉴에 추가되게 한다. 그때 버네이스가 만들어낸 슬로건 중의 하나가 "입에서는 한순간의 즐거움이 있지만, 그 여파는 10년동안 엉덩이에....."(A moment in the mouth and ten years upon the hips)이었다. 이 구호 때문에 설탕업체, 코코아 브로커상, 땅콩버터 메이커들로부터 부당하고 스포츠맨답지 않은 공격이라는 성토를 당했지만 모든 상황을 압축하여 고객을 감동시키는 카피를 작성하고 마케팅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버네이스는 40년간 435개의 고객을 위해 일하였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이런 '고객감동'이 널리 알려지자 고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는 것이다. 버네이스는 말년에 회고하기를 내가 고객으로 맞이하기 위해 고객과 상당한 시간과 고객으로 맞이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즉 '거절하기'(reject)위해 보낸 시간들이 거의 동일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에디슨의 백열등 발명 50주년행사를 일반적인 평범한 생각으로는 "에디슨 백열등 발명 50주년 기념행사"라는 내용으로 제목을 정하는 것이 보통 생각인데 버네이스는 "빛의 황금축제"(Light's Golden Jubilee)라는 멋진 제목을 하나 만들어 내니 언론과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그 행사에 후버(Hoover) 대통령을 비롯한 당대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저명인사들이 그 행사에 참석하고 수많은 언론들이 가사로 취급하니 전쟁이 아닌 평화시의 미국 최고의 이벤트로서 평가받는 성공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Golden Jubilee는 결혼 50주년을 의미하는 금혼식의 의미도 있어 3개의 단어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너무나 함축적이었다. ‘Light'는 성경 구약성서에 나오는 빛을 의미하고, ’Gold'는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황금이며, ‘Jubilee'는 인간이 즐기는 축제이다. 완벽한 하나의 조합을 이룬 것이다. PR관련서적에는 이 행사를 세기적인 퍼블리시티 쿠테타(publicity coup of the century)라고 부르고 있다.

 

IMF사태동안 각 조직들이 한창 구조조정에 물두하고 있을 때 구조조정을 영어로 "downsizing" 즉 규모를 축소조정된다는 말로 사용되었다. 축소한다는 의미자체가 사업이 여의치 않으니 축소조정한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그때 의미론(semantics)의 전문가들의 "rightsizing" 즉 "적정조정"이라고 말하였다. 과거에 직원의 수가 방만한 규모였는데 이제 적정한 규모로 정상대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적정조정"이라고 표시하였다. 똑같은 하나의 상황을 "적정조정"이라고 언급하느냐 아니면 "축소조정"이라고 언급하느냐는 그 영향이 상당히 다르다. 다만 이런 과정에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면이 있다면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하겠지만 윤리적인 문제가 없고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양쪽이 다 가능할 때는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버네이스가 의미론 측면에서 너무 천재적이기에 그를 Semantic Tyranny"즉 의미론의 황제로까지 부른 PR학자들도 있다.

 

훌륭한 PR인이 되기 위해서는 의미론의 황제는 못되더라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PR에 접목시키는 전략이 요구된다.

 

 

8. 아이보리를 모든 미국인들의(All-American)비누로 만들다.

 

버네이스가 30여년동안 P&G(프록터 앤 갬블)에 제공했던 PR 서비스는 여러 면에서 현대 PR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제품 퍼블리시티에서부터 범국민적 캠페인에 이르기까지 버네이스는 다양한 PR 기법을 사용했는데, 지역사회관계, 위기관리, 대정부관계 및 공중 관계, 미디어 캠페인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P&G의 시장 내 위치를 끌어 올렸다.

 

생각과 행동에서 버네이스는 공중과 개인의 흥미를 유발하여 관심을 끌고, 일개 사업의 선전을 뛰어넘는 어떤 공적이나 공훈의 지위에까지 도달하며, 지역사회에서 리더쉽을 발휘함으로써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항상 강조했다.

 

버네이스의 PR 활동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20년대에서 50년대까지 P&G는 버네이스의 가장 중요하고 충실한 클라이언트 였다.

 

P&G는 1837년에 양초 제조업자였던 윌리엄 프록터(William Procter)와 비누 제조업자였던 제임스 갬블(James Gamble)이라는 사람이 합작으로 만든 회사로서, 1860년대에 들어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에 비누와 양초를 납품하며 크게 성장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 토마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함으로 양초의 수요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P&G는 자연스레 비누 생산 쪽으로 회사의 생산 비중을 옮겼다.

 

1879년에 P&G 비누공장의 한 조심성 없는 직원이 물비누통 젓는 기계를 그대로 켜놓은채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돌아와보니 흰 거품이 많이 생긴 것 이외에는 큰 문제가 없어보여 그 직원은 비눗물을 그대로 응고시켜 비누를 만들어 출고 시켰다. 얼마 지난 후, P&G에 물에 뜨는 비누를 사고싶다는 편지가 쇄도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비눗물을 훨씬 더 많이 저었을 때 공기가 주입되어 거품이 생기고 비누가 가벼워져서 물에 뜨게 된 것이다.

 

아이보리는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졌지만 물에 뜨는 비누는 훨씬 더 가볍고, 거품이 풍부했으며 순하고 부드러웠다. 따라서 P&G는 기존의 비누보다 훨씬 순하고 부드러운 아이보리 비누를 "Pure"(순수)라는 컨셉으로 적극적인 지면 광고 캠페인을 벌였고, 우아한 여성, 어린아기, 성직자 등을 모델로 광고를 집행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캠페인 덕에 1890년대에 P&G는 30여종이 넘는 미국 최대의 비누 생산업체가 되었다.

 

1923년 그 당시 이미 혁신적인 기업문화로 널리 알려졌던 P&G가 버네이스를 고용하여 아이보리 비누 캠페인의 확대를 의뢰했다. 버네이스는 PR을 실행하기 전, 우선 대대적인 소비자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이 무색, 무향(unperfumed)의 순한 비누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시중에서는 아이보리가 유일한 무향의 비누였기 때문에, 버네이스는 이 설문조사 결과를 언론에 적극 배포해 보도되도록 유도함으로 큰 판매 증진의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이보리 캠페인의 모델이자 타겟층이었던 어린이들은 비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수할 때 비누 때문에 눈이 따갑다고 불평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씻기를 싫어해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정도 샤워를 했다. 버네이스는 비누에 대한 이런 아이들의 태도를 개선시키고 싶어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닌 매일 샤워하는 유행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만 되면 비누 사용량이 일곱 배로 증가해 매출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버네이스의 해결책은 간단 명료했지만 아주 효과적이었다 - "비누의 적인 아이들이 아이보리 비누 사용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버네이스의 ‘비누의 적인 아이들이 비누를 좋아하기 만들자 라는 생각은‘PR의 대상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PR대상을 둘러싼 문화와 풍토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라는 그의 PR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흔히 기업은 제품에 대한 공중의 태도가 비호의적이라는 것을 느끼면 제품자체를 바꾸거나 새 제품을 시장에 내놓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버네이스는 공중을 녹색무도회에서 유행의 색깔을 녹색으로 바꾼 것처럼 공중을 둘러싼 문화와 풍토자체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1924년 버네이스는 전국비누조각대회 (National Soap Sculpture Contest)를 조직했으며, 큰 상금을 내걸어 공중의 관심뿐만 아니라 언론의 주의를 이끌었다. 아이보리의 판매 증대를 위한 이벤트였지만 결코 아이보리나 P&G의 이름은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음으로 상업적인 거부감을 불식시켰다.

 

첫 대회에는 일반 조각가, 건축가 및 기타 예술인들이 참가하여 450kg가 넘는 아이보리 비누를 조각했으며, 이듬해부터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 국민적인 대회로 발전시켰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첫 대회는 약 2천백만 명이 참가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버네이스는 일년에 한 번 개최되는 대회 뿐만 아니라 평소 학급의 미술시간에도 비누를 이용하여 조각을 하게끔 유도했다. 1961년까지 37년 동안 계속된 이 전국비누조각 대회는 매년 수 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서로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겨루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회 수상작들은 뉴욕 및 전국의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미국 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언론 홍보 효과를 창출해 냈다. 공식은 간단했다 - 버네이스는 이벤트를 만들었고, 이벤트는 뉴스를 만들었고, 뉴스는 제품 혹은 서비스의 판매증진 및 이미지 제고의 결과 가져왔다. 이로써 버네이스는 퍼블리시티에의 새로운 발전적인 접근을 제시했다. 그는 경쟁사의 몫를 뺏어 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버네이스가 다양한 기법들 즉, 비누요트 레이스같은 이벤트 전국비누조각대회 같은 컨테스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는 잘 만들어진 광고나 마케팅 전략보다는 버네이스가 이용한 컨테스트나 이벤트 같은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직 제품의 장단점을 신중히 분석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이벤트 등으로 아이들의 머릿속에 한 번 좋은 이미지를 심는다면 그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버네이스는 이런 것을 잘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아이보리 비누를 잘 포장하였다.

 

사실상 이 대회의 상업적 결과를 측정하기는 어려우나, 버네이스가 베이컨과 계란을 모든 미국인들의 아침식단(All American Breakfast)에 올려 놓았던 것처럼, 아이보리를 모든 미국인들의(All American) 비누로 만들었던 것이다.

 

마케팅 혹은 광고에서 말하는 생필품이자 저관여 제품인 아주 사소한 비누라는 제품이 매년 어린이들이 기다리는 문화 행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PR인 뿐만 아니라 고객에게 즐거운 경험/체험과 더 나아가 어떠한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평생관계 맺기를 해야 한다는 최근의 마케팅의 궁극적인 목적을 보는 트렌드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이후 P&G의 사장이 “내 인생에 있어서 힘에 이렇게 극적으로 노출되어 본 것은 처음이다. 난 기업에 있어서 여론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라고 한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떻게 보면 한 명의 PR인이 전략적으로 수행한 PR프로그램이 지금까지 마케팅에서 유명한 P&G의 마케팅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비누조각대회에도 위기는 있었다. 뉴욕출신의 한 대회 입상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친구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여자친구가 올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누를 조각하며 기다렸다. 밤에 여자친구가 돌아와서 다시 사귀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는 여자친구와 그의 엄마를 조각칼로 조각해버렸다. 한 기자가 살해 현장에 도착해서 살인범과 비누조각대회를 연결 지어 기사를 쓰려고 하자, 대회조직위원회는 그 살인범과 비누조각대회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발표했고, 집에 있던 비누조각들은 필시 그 여자친구의 작품이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버네이스는 이러한 발빠른 대응으로 대회가 큰 루머에 휩싸이는 일을 막았다.

 

아이보리를 PR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버네이스는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아이보리 비누로 만든 요트 경주 대회를 창안해 내어 다른 각도에서의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또한 각 가정에서 아이보리 비누 사용을 권장하는 전국 가정부 서비스(National Household Service)를 인용, '생활의 지혜'를 담은 책자를 배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아이보리 비누의 판매를 촉진했다. 또한 버네이스는 각 지방의 상징물, 동상 및 공공 건물들을 순수 결정체인 아이보리 비누로 깨끗하게 세정함으로 각 지방의 순수한 긍지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1930년대의 P&G의 한 PR 책임자는 "버네이스의 아이디어는 개념적(conceptual)이고, 독창적이었으며, 마술과도 같았다"고 말한바 있다.

 

1943년 P&G의 PR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버네이스는 전쟁관련 미팅을 위해 워싱턴까지 P&G의 사장이었던 R.R. Deupree와 동행했는데 Deupree는 이때 버네이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공중의 힘에 대해 알게 된 내 인생의 첫번째 순간이었다"면서, "공중의 의견을 얻기 위해 회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고 말했다.

 

버네이스는 이미 이 당시에 MPR 전략을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제품 판매를 위해 그는 간접적인 PR방식을 택해 마케팅을 지원했다. 그는 클라이언트의 이익을 위해 언론 매체를 이용하여 여론을 유리하게 환기시키고 공중 또는 매체의 이목을 끄는 많은 이벤트를 성공시켰다.

 

 

9. 제3자(Third-Party)이용마케팅 - 필코(PHLCO)라디오와 TV

 

대공황기에 도입된 라디오는 하층민 사이에서 급속히 사용이 증가한 반면, 부유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필코라디오 사의 제임스 스키너 (James M. Skinner) 사장은 버네이스 (Edward L. Bernays)에게 자사의 홍보를 의뢰했다. 스키너 사장은 버네이스의 홍보 프로그램으로 인해 자사의 제품들이 부유층 청취자에 어필됨으로써 자사 제품의 가격인상이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수익이 증대될 걸로 기대했다.

 

 

 

필코 라디오 홍보를 위한 준비작업으로서 버네이스는 음악애호가들에 대한 약식의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라디오 수요 증가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은 당시의 라디오들이 정확한 음 재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버네이스는 필코라디오의 고성능 품질을 실증해 보임으로써 라디오에 대한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 걸로 판단하고서, 필코 라디오의 고성능 라디오 시연회, RIAA를 통한 방송의 질 향상 캠페인, 라디오 음악실 전시회 및 필코사 텔레비전 시연회(demonstration) 등을 기획하였다.

 

 

필코 라디오의 홍보를 위해 버네이스가 구체적으로 실행한 프로그램들은 다음과 같다.

 

1) 필코 라디오의 고성능 라디오 시연회

 

버네이스는 음악애호가들에 대한 약식의 조사를 통해 라디오 수요 증가에 최대의 걸림돌은 정확한 음 재생을 하지 못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필코라디오의 고성능 품질을 실증해 보임으로써 라디오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려 행사를 기획하였다.

이 행사에서 버네이스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Warldorf Astoria) 호텔 그랜드 볼륨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유명가수인 루크레지아 보리 (Lucrezia Bori) 가 노래토록 하고, 그의 노래를 필코라디오 사의 신제품 라디오를통해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이 행사에는 언론이 초청되었으며 행사 다음날 한 신문은 ‘라디오 수신율(radio reception)이 인간의 음성만큼 뛰어나다‘라고 보도하였다. 이것은 버네이스가 시연회를 통해 입증하려 한 것이었다.

 

 

2) RIAA를 통한 방송의 질 향상 캠페인

한편 방송의 질을 높임으로써 식자, 부유층에 필코 라디오를 어필하고 결과적으로 라디오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 버네이스는 음향 라디오 학회(Radio Institute of the Audible Arts: RIAA)를 통해 라디오 방송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필코라디오 사가 이 단체를 후원하였으며, 방송의 질 향상 캠페인에는 양질의 음악, 방송, 교육 프로그램 을 요구하는 캠페인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캠페인의 결과, 열광적인 라디오 청취자 층이 부상하였고, 라디오는 교육목적으로 도서관 등에서 다용도로 활용되었으며 음악클럽 들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캠페인의 결과, 필코라디오 사는 자사의 우수한 제품을 고가로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증대할 수 있었다.

 

3) 라디오 음악실 전시회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실행한 이후에도 여전히 라디오를 구입하지 않는 상류층이 존재하자 버네이스는 록펠러 플라자에서 캐비닛에 라디오를 설치한 라디오 음악실 전시회를 실시하였고, 당대 최고의 디자인 회사들이 전시를 맡았다.

행사는 성공적이었고 행사효과에 대하여 버네이스는 빈곤층의 장난감이 부유층의 음향 기기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4) 필코 사 텔레비전 시연회

필코 사의 텔레비전을 언론에 소개하기 위해 버네이스는 필코의 필라델피아 공장에서 텔레비전 시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를 통해 초대된 언론은 텔레비젼의 중요성과 폭발적인 팽창성을 인지하고 이러한 내용을 독자들에게 알리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힘입어 필코 사는 텔레비전 생산 분야에서 선두주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버네이스가 기획 실행했던 홍보 프로그램들은 각각 기대했던 효과를 나타냈다. RIAA를 통한 방송의 질 향상 캠페인 결과, 상류층 라디오 청취자층 출현하였고 필코라디오 사는 이들에게 자사의 우수한 제품을 고가로 판매 함으로써 이윤을 증대할 수 있었다.

 

필코 라디오의 고성능 라디오 시연회의 경우, 버네이스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유명가수인 루크레지아 보리 (Lucrezia Bori) 가 노래토록 하고, 그의 노래를 필코라디오 사의 신제품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라디오 수신율(radio reception)이 인간의 음성만큼 뛰어나다. 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필코라디오의 고성능 품질을 실증할 수 있었다.

 

또한 라디오 음악실 전시회 프로그램을 실행 한 후 그 효과에 대하여 버네이스는  빈곤층의 장난감이 부유층의 음향 기기가 되었다고 자평하였다.

 

끝으로 필코 사 텔레비전 시연회의 경우, 참석 언론은 텔레비젼의 중요성과 폭발적인 팽창성을 인지하고 이러한 내용을 독자들에게 알리게 되었으며, 필코 사는 텔레비전 생산 분야에서 선두주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버네이스가 필코 라디오 홍보를 위한 마케팅 전략을 살펴보고 그 기법을 분석해본다.

 

1) 큰 사고(Big think)

버네이스는 RIAA를 통한 방송의 질 향상 캠페인 에서 방송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부유층에 어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라디오 가격을 인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2) 전위 조직의 조직및 활용

방송의 질 향상 캠페인 은 필코라디오 사가 후원한 RIAA 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 캠페인의 결과 방송의 질이 향상되어 식자 및 부유층에 어필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필코 사는 자사의 라디오 가격을 인상할 수 있었다. 이는 효과적인 전위그룹 활용 예에 해당한다.

 

3) 관심을 빌리다(Borrowing Interest)

버네이스는 필코 사의 고성능 라디오 소개 프로그램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가수인 루크레지아 보리가 노래토록 함으로써 언론의 많은 이목을 끌 수가 있었다. 즉, 유명한 오페라 가수인 루크레지아 보리에 대한 언론 및 대중의 흥미를 차용하여 홍보에 활용한 것이다. 또한  라디오 음악실 전시회  프로그램에서는 라디오 음악실 전시회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언론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다.

 

4) 프로그램 제안을 위한 사전 조사 실시

버네이스는 필코 사의 고성능 라디오 소개 프로그램 제안에 앞서 음악 애호가들에 대한 약식의 조사를 통해 라디오의 최대의 문제는 정확한 음 재생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5) 특정 계층을 겨냥한 프로그램 개발

버네이스는 대상 계층을 명확히 구분하여 각각의 홍보 프로그램들은 그 대상 계층을 고려하여 개발하였다. 가령, RIAA를 통한 방송의 질 향상 캠페인 및 라디오 음악실 전시회 프로그램 등은 식자 및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위의 프로그램 및 전략 들이 1930년 대에 개발되고 실행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고려할 때, 버네이스의 필코라디오사 마케팅사례도 많은 다른 사례들과 더불어 버네이스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0. 이미지 관리(Imagement)전략 통해 쿨리지를 백악관으로

 

1924년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를 4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되도록 하기 위해 버네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는 일년 전 워렌 하딩(Warren G. Harding) 대통령이 서거하자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잔여임기 1년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다가올 대통령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는데 몇가지 장애요인이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가 그의 성격이 매우 까다로워 그 아무도 그 성격을 부드럽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테디 루즈벨트(Teddy Roosevelt)의 딸 엘리스 루즈벨트 롱워쓰는 그의 까다로운 성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은 쿨리지에 대해 한결같이 경계하였는데, 이는 뉴욕시의 전직 경찰부장이었던 라인랜더 왈도(Rhinelander Waldo)와 관련된 일 때문이었다. 비록 왈도가 민주당원이었지만 그는 공화당원이었던 쿨리지(Coolidge)를 칭찬했다.

 

왈도는 만약 그가 쿨리지(Coolidge)를 돕는다면 쿨리지가 자신을 뉴욕 주지사 혹은 필리핀의 제독으로 그를 밀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왈도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쿨리지를 뒤에서 지원하는 쿨리지 초당파 연대(Coolidge non-partisan league)를 만들었지만, 역부족을 느끼고 버네이스와 같은 탁월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래에는 공화당원들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를 옹호하거나 또는 민주당원들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옹호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당시엔 이런 상황은 매우 특이해서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버네이스는 기업 고객들을 위해 전위 그룹을 조직했던 것처럼 초당파연대(Non-Partisan League)라는 말을 집중적으로 언론에 노출시켰다. 그는 모두가 초당파연대감(nonpartisanship)에 관해 확실히 이해하도록 코끼리와 당나귀 사이에 낀 왈도의 그림을 포함 관련 기사자료를 1000여 곳의 신문사에 배달했다.

버네이스는 또 쿨리지를 지원할만한 유명한 민주당원을 찾았다. 버네이스의 전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버네이스는 왈도가 결국 초당파연대감(nonpartisanship)으로 비춰질지라도 너무 소수의 유권자들이 이러한 당파적 호소에 의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심각한 이야기들이 대통령의 심각한 이미지만 강화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 필요했다. 버네이스가 대통령에 대해 차갑고 내성적인 사람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서민적인 대통령의 모습으로 바꿀 훌륭한 솜씨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어느 날 밤 뉴욕의 브로드웨이의 무대가 막을 내리고 40여명의 연기자들이 밤 기차를 타고 수도 워싱톤 DC로 옮겨왔다. 새벽기차를 탄 배우들 중에는 Al Jolson, Ed Wynn, The Dolly Sisters, Charlotte Greenwood, Raymond Hitchcock과 같은 유명 스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 무리의 캐딜락이 그들을 유니온 역에서 마중 나와 쿨리지와 영부인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악관으로 실어 날랐다. 유명한 스타들과 장래가 촉망되는 여자배우들이 버네이스의 소개에 따라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대통령은 시종일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무뚝뚝한 표정을 지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만찬 룸에서 커피와 과일, 토스트, 케이크와 소시지 등을 즐겼다.

아침식사 후 대통령은 백악관 잔디로 손님들을 안내했는데, 거기서 시인 졸슨(Jolson)이 "쿨리지를 당선시키자"라는 제목의 노래를 그를 위해 찬양했다. "경주는 지금 시작했다, 그리고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채울 그 하나다. 야단법석 떨지 않고 그는 우릴 위해 많은걸 했다. 그래서 그에게 보답하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하자."라고 그는 노래를 불렀다. 쿨리지여사와 브로드웨이 대표단이 후렴구를 따라했다. "쿨리지를 당선시키자! 쿨리지를 당선시키자! 그리고 4년 더 하는데 아무런 무리도 없다"

신문들은 그 사실을 특종화했다. 뉴욕 타임즈는 그 이야기를 "배우들이 대통령과 케이크를 먹었다. 대통령이 거의 웃었다"(nearly laugh)라고 헤드라인에 달았다. 뉴욕 리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졸슨이 대통령을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웃게 했다."라고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리고 뉴욕월드는 "뉴욕 배우들이 사회 지도자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한일을 3분 만에 캘빈 쿨리지와 함께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전통적으로 불가능했고 심지어 대중 앞에서 2년 반 동안 고위 관료와 상하 의원들은 그를 그렇게 만들지 못했다. 배우들은 대통령의 이를 보이게 했으며 그의 입을 열고 웃게 했다"라고 보도했다.

수년 후 버네이스는 그가 한 일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온나라의 언론의 제목과 기사내용이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놀라움을 표현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쿨리지의 명성을 바꿔놓았다."

 

그 혼자의 손으로 쿨리지의 이미지를 바꿔놓았던지 아니던 간에, 그는 언론에 또 국민의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놀랍고 압도적인 사건을 만들어냈다. 3주 후 쿨리지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버네이스의 명함

 

그루닉교수의 PR의 4개 모델 중 가장 초보적인 것이 publicity 또는 press agentry(언론대행술)모델이다. 이 모델의 특징은 상당히 과장되고 왜곡을 시키면서까지도 목적을 이루기만하면 된다. 미국 초창기의 독립전쟁시에도 보스톤 대학살(Boston Massacre)이라고 명명한 사건은 몇 십명이 죽거나 부상당한 사건이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보스톤 대학살이라고 과장하여 반영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경우 이러한 전략을 짠 사람들을 "press agent" 즉 "언론대행업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의미는 과장을 일삼는 윤리성을 갖추지 못한 즉 "P"(피)나게 "R"(알)리기에만 몰두하였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그래서 버네이스는 "press agent"라는 직함을 명함에 쓰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버네이스는 "퍼블리시티'에 대한 새롭고 발전적인 접근 방식이 개발됨에 따라 이를 반영하는 새롭고 발전적인 직함이 생겨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 발생전까지 그는 스스로를 '언론대행업자'(press agent)라 부르는데 만족하였으나 1919년 맨해튼 48번가에 사무실을 그는 업무 범위가 확장되었으므로 '퍼블리시티 감독'(publicity direction)라는 직함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본인 업무의 중요도나 기술의 범위, 전문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일 년후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당시 버네이스의 클라이언트였던 유명 테너가수) 소송과 관련해 법정에 서게 되었을 기자가 직업을 묻자 'PR카운셀러'라는 대답을 했다. 드디어 만족할 만한 직함을 고안해 것이다. 고객을 만족시키는 고급 전략을 수립하지 않고는 진정한 카운슬러가 없는 것이다.

 

 

11. 바나나는 위장에 좋으니 바나나 많이드세요: UFC의 바나나 판촉 활동

 

1870년 로렌조 다우 베이커(Lorenzo Dow Baker)가 우연히 자메이카에서 송이 당 25센트

정도 하는 바나나를 가져다 뉴욕에서 3불 25센트로 팔기 시작하면서, 1885년에 이 사업은 무려 1,000만 송이의 바나나를 수입해 판매하는 큰 사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1899년 설립된 유나이티드 프룻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 UFC)는 21만 에이커의 대지와 112 마일의 철도를 소유하고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그리고 이후 바나나 리퍼블릭으로 알려지게 되는 인접 국가들에게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대형 회사로 성장한다. (참조: 바나나 리퍼블릭은 북미인들이 정치/사회적으론 후진국이나 경제적으로는 발전을 이루던 일부 라틴 아메리카 국가를 경멸하던 용어)

 

이후 바나나맨 샘(Sam the banana man)으로 알려진 사무엘 제무레이(Samuel Zemurray)가 UFC의 사장이 되어 1949년에 이르러서 UFC는 미국 최대 기업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5천 4백만 달러의 매출과 대규모 철도와 항만시설을 소유하고 83,000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로 명성을 떨치며 미국 바나나시장의 50%이상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제무레이 사장은 운송과 저장이 어려운 겨울철에 바나나를 더 많이 팔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 위해 1940년대 초 버네이스를 PR 카운셀러로 고용한다.

 

이러한 숙제에 대하여 버네이스가 제안한 전략은  바나나를 건강과 결부시키자 는 것이었다. 여기에도 또 한번 그의 Big Think(큰사고)가 도입되며, 제3자 인증(Third-Party Endorsement)전략도 함께 도입된다. 제3자로 뉴욕의 유명한 소아과의사가 동원된다.

 

열대과일이 복강 내 질병과 만성소화불량에 효과가 있다는 발표를 의사 시드니 하스(Sidney Haas)를 이용 그가 자신의 의사취임 50주년 기념일에 바나나는 소화를 돕는다는 언급을 하도록 하여 언론에 대대적으로 노출시킨다.

 

버네이스는 이와 관련해 10만부의 자료를 만들어 각 신문사, 도서관 사서, 영양학자, 가정학자, 소아과 의사들에게 보냈으며, UFC로 하여금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스 박사의 연구를 지원하도록 했다.

 

버네이스는 바나나를 미국의 국가안보와 연결시켰다.

 

1942년 한 메모에서 버네이스는 미국이 바나나 수입을 계속해야 하는 3가지 이유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 미국의 바나나 수입은 중앙 아메리카의 안정을 유지한다.

- 미국의 바나나 무역은 파나마 운하로 방위산업물자를 전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미국에 경제적 기초를 제공한다.(세계 1, 2차 대전 당시 UFC의  Great White Fleet은 군대와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데 사용되었다.)

- 방위산업물자를 전달하는 수송선이 빈 수송선으로 돌아오게 해서는 안된다. 북반구의 유대강화와 좋은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를 위해서도 바나나를 수입해 오도록 해야 한다.

 

이 전략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방위산업적인 면을 모두 고려한 현실적인 전략이었으며 버네이스의 거대한 사고(큰 사고 (Big Think))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공공 이익 뒤에 숨은 고객 이익 창출을 위한 전략이었다.

 

더 나아가 버네이스는 바나나를 호텔, 철도의 식당차, 비행기, 증기선등에 비치되도록 했으며, 축구선수, 여름 캠프족, YMCA & YWCA 회원, 걸/보이스카우트들에게 제공했다. 케잌, 쿠키, 아이스크림, 사탕공장에 바나나를 PR하고, 최고급 휴양시설과 영화관에도 바나나를 취급하도록 만들었다.

 

버네이스는 UFC가 북미지역 경제에서 위치를 확고히 다지려면, 바나나 판매 뿐 아니라 남미에 대한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를 위해 중앙 아메리카 정보청(Middle America Information Bureau)'라는 프론트 그룹을 만들고 관련 브로슈어와 보도자료를 끊임없이 배포했다.

 

중앙아메리카 정보청은 학자나 기자들을 재교육하는 순수한 의도도 있었지만, 모든 배포자료는 UFC의 승인을 전제로 했으며, 자료 기사들의 내용엔 UFC를 언급해 UFC의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중앙아메리카 지역에 관한 자료는 모두 UFC에서 제공받아 사용했다.

 

버네이스는 UFC가 그들의 수입원이 되는 국가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 내 영업 조직의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버네이스는 제무레이 사장의 일부 부동산 반환을 공중에게 알렸으며, 과테말라와 온두라스의 시설을 돌아보고는 노동자들의 사기저하와 수준이하의 생활조건을 UFC에 강력 경고했다.

 

한달의 과테말라 방문기간 동안 버네이스는 제무레이 사장이 간과한 여러 문제들 - 현지 노동자들이 미국 상관이 지나갈 때 모자를 벗어야한다든지, 직원들이 전혀 발전의 기회가 없다고 느끼는 점 등 - 을 파악했는데 이는 집, 의료시설, 학교 등을 제공했던 그의 긍정적 측면을 잠식할만한 일이었다.

 

버네이스는 이같은 문제들이 모두 강력한 PR 전략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급기야 1948년 제무레이의 후임 토마스 카보(Thomas D. Cabot)에게 중앙 아메리카 정보청의 해산을 통보 받게 된다.

 

UFC가 중앙 아메리카 정보청을 폐쇄한 것과 버네이스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보고 느낀 문제점을 시정할 것을 거부한 사건은 버네이스가 UFC와 관계를 끊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PR업계의 동료들에게 불미스런 고객을 대행하지 말 것과 제안이 거절 당했을 땐 미련없이 고객을 떠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UFC와의 결별은 연 10만불에 해당하는 리테이너 피(retainer fee)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2. 루브르 박물관에 미국산 실크를 전시하여 고객을 즐겁게 하다.

 

뉴욕에서 100년 동안 가문 대대로 실크 제조업에 종사해온 체니 브로더즈사는 자사 실크제품의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자체의 고유한 스타일 감각을 개발하기 위해 미술 전문가인 헨리 크렌지를 고용했고 그리고 크렌지는 버네이스를 고용했다.

그들이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프랑스가 실크의 스타일을 독점하고 있었다. 버네이스는 프랑스와의 경쟁보다는 협력을 택했다.

 

그는 첫째 300개의 규모가 작은 신문사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매트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둘째 백화점 판매원들을 위한 패션 화보를 제작하였으며 셋째 수백 명의 신문사 편집자들에게 프랑스 패션에 대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 등의 체니 스타일 서비스를 창안했다.

 

유명인과 제품과의 연계를 하는 것이 판매 촉진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굳게 신봉하고 있는 버네이스는 체니 브러더즈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직원이 백악관에서 퍼스트 레이디인 하딩 여사에게 실크드레스를 선물하는 것을 주선했다.

이 증정에 관한 뉴스가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보도되었을 때, 버네이스는 체니브러더즈가 생산한 실크를 실크 생산지로 유명한 프랑스의 리옹에 있는 섬유 박물관에 보냈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제품을 인증하는 프랑스의 보도가 역으로 미국 신문사에 전송되자 체니 브러더스와 크렌즈에 대한 신뢰는 더욱 굳어졌다.

다음으로 버네이스는 '산업속의 예술'이라는 훈장을 제정하여 건축협회가 이 훈장을 헨리 크렌지에게 수여토록 했다.

그상은 체니 브러더스를 널리 홍보하는 결과를 나았고, 그리고 '산업 속의 예술(산업과 예술의 조우)'이라고 하는 컨셉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크렌지가 프랑스의 유명한 철공예작가 에드가 브랜트의 뛰어난 작품성에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버네이스는 브랜트의 철공예작품을 체니 브러더즈의 실크로 장식한 전시회를 뉴욕과 전 미국에 걸쳐서 개최하여 예술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패션계 잡지와 디자이너들은 다시 한번 체니브러더즈를 인증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프랑스의 인증을 추구해온 버네이스는 미국의 실크를 르부르 박물관에 처음이자 영원히 전시되도록 했다.

이 르부르 박물관의 전시회에 대한 대중 매체의 보도는 체니 브러더즈를 '산업 속의 예술‘의 대변자로서의 위상을 굳게 했다.

버네이스, 크랜지, 그리고 체니 브러더즈는 화가인 조지아 오키페(Georgia O'Keefe)를 임명하여 체니 컬러를 기반으로한 회화작품을 창작토록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가게에 장식하게 했다.

체니 브러더스의 매출은 놀랄만한 신장을 기록했으며 그리고 그들은 이제 PR활동이 판매를 촉진하는 MPR의 기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25년 파리에서 현대 장식 ․ 산업 예술 국제 박람회가 열렸을 대, 버네이스는 미국측의 연출을 책임졌었다. 그 박람회는 17주 동안 계속 되었지만 박람회에 대한 언론기사는 훨씬 더 오랜 기간동안 계속 되었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처음으로 "산업 속의 예술(산업과 예술의 조우)"을 인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박람회 참가는 미국과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수년간 섬유, 광고, 가구, 인쇄 및 타 분야에서도 체니 브러더스의 프랑스 스타일 응용을 잘 반영해 주었다.

버네이스는 PR활동으로서 제조업체의 생산품도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13. 전위단체(front group)를 조직하여 GM 차량 판촉 성공

 

1930년대 미국 경제는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러한 경제공황기에 자동차를 판매한다는 것은 하나의 난관이었다. 1932년 매출이 46.6%나 급격하게 감소한 GM은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해에 뉴욕 모터쇼 개최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GM은 전시될 GM 차량의 판촉을 위해 버네이스를 시급하게 고용하게 된다.

 

버네이스는 한달 여 밖에 남지 않은 뉴욕 모터쇼를 위해 신속하게 PR의 목표와 방법을 선정했다. 우선 PR의 목표로,  뉴욕 모터쇼를 성향이 자유로운 소비자들에게 GM의 새 모델들을 판촉하는 기회로 삼는다 고 정했다. 즉, 그가 실행할 PR의 목표 공중을 경제공황이라는 시기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성향이 자유로운 소비자들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외풍을 막아내는 혁신적 자동차 윈도우에 40%, 그리고 가격 대비 우수한 품질에 35% 정도의 강조 비중을 둔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즉 목표 공중에게 외풍을 막아내는 혁신적인 윈도우와 비용 대비 우수한 가치라는 두 가지의 핵심 메시지로 GM 차량의 우수성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러한 메시지 전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버네이스는 먼저 "도시교통개선위원회(Metropolitan Committee on Better Transportation) 라는 전위 단체(front group)를 조직하여, 그 위원회가 개선된 차량 환기장치를 추천하는 보고서를 발표토록 했다. 버네이스가 즉 제3자 인증 최초 고안한 이 보고서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자 GM은 1933년형 GM 모델이 위 위원회가 추천했던 환기장치를 갖추고 있음을 즉각 발표했다.

 

이어서 개선된 환기장치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버네이스는 전문가들로부터의 인증 즉 제3자 인증 확보에 나서게 된다.

 

그는 우선 현직 엔지니어들로부터 GM의 혁신적인 합성 스틸과 우드 바디에 대한 인증을 확보하고, 전국건조물소매협회(National Retail Dry Goods Association)를 통해 GM 품질에 대한 인증을 확보했다.

 

또한 B&O 철도회사 사장,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of N.Y.) 대표, 예일대학 총장들과 같은 미국내 유명한 비즈니스 리더들로부터 GM의 R&D 노력과 투자를 인정하는 150여건의 코멘트를 받아냈다. 이들의 공통된 핵심 메시지는 "우수한 품질에 대한 투자가 자동차의 가격을 인하하려는 노력보다 더 나은 투자라는 것이었다.

 

당시 포드(Ford)의 경우 효율성을 강조해 값싼 자동차를 대량 생산해 누구나 차를 갖게 만들자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에 비해 GM은 자동차 소유자의 차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에 깊게 파고드는 자동차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에 따라 GM은 가격, 디자인, 성능 등 다양한 차종을 양산했고, 또 같은 차라도 매년 새 모델이 나오는 관행을 이때부터 확립시켰다.  GM에서는 내가 원하는 어떤 차라도 살 수 있다 는 것이 GM의 슬로건이었다.

 

뉴욕 모터쇼 개최 기간 중, 버네이스의 제안에 따라 알프레드 슬론(Alfred P. Sloan, Jr.) GM 사장은 세 번의 오찬을 주최하게 된다.

 

첫번째 오찬에서 슬론 사장은 GM의 새로운 기술력과 끊임없는 혁신을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40여 개국 외교관들을 초청한 두 번째 오찬에서는 국가간 상호 이해를 위해 자동차 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GM의 전망을 설명했다. 세 번째 오찬에서는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초청하여 기업활동과 주식시장에 대한 일반인들의 낙관적 견해를 보여주는 버네이스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여 소비심리를 끌어올렸다. 이로써 일반인들에게 'GM은 곧 혁신'이라는 이미지를 각인 시키게 됐다.

 

기대를 넘어선 결과에 만족한 슬론 사장은 버네이스를 GM 고문으로 영입하였고 마침내 PR이 광고보다 효과적이며 저렴함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슬론 사장은 버네이스에게 GM의 50여 자회사 임원진 교육을 의뢰했다.

 

PR에 대한 슬론의 태도 변화는 연례보고서에 나타난다. "기업의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공중과의 관계다. 기업의 성공은 일반 공중의 요구와 시각에 대한 기업측의 실제적인 이해와, 동시에 기업 활동의 동기에 대한 일반 공중의 이해에 달려있다.“고 했다.

 

대공황은 기존에 기업들이 갖고 있던 단순히 만들기만 하면 팔린다는 사고를 변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다. 버네이스는 GM을 위한 PR을 수행함에 있어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결과적으로 훨씬 더 큰 효과를 거두게 됐다. 또한 그는 새로운 소비자의 인식을 리드하고 변화시켜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하는 현대적 마케팅 개념을 기본으로 기업의 PR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GM이 버네이스를 통해 PR을 전격적으로 수용하자 이는 다른 산업 및 사회 전반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GM은 1937년에는 42%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21%로 떨어진 포드를 압도하게 된다.

 

 

14. 히틀러PR을 거절한 버네이스는 누구인가?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1892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버네이스가 1세때 그의 부모는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의 뉴욕시로 이주, 버네이스의 외삼촌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가 오스트리아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버네이스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곡물상인으로 성공했다. 16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버네이스는 코넬 대학교에서 1912년 농업학 석사학위를 받고, 곡물시장에 투신하지만 얼마 후 의학잡지사에 들어가 편집 일을 보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상한제품 Damaged Goods>라는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 연극이 성병과 같이 금기시 되어 오던 주제들을 다루어 큰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 버네이스는 이 연극 프로모션에 개입한다.

버네이스는 먼저 사회지도층 인사들로부터 이 연극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계획을 포함한 전략적 프로모션 계획을 수립하여 성공함으로써 결국 이 연극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버네이스에게는 그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평생을 PR활동에 헌신했던 버네이스의 주요저서로는 <여론의 구체화, Crystallizing Public Opinion>(1923), <선전, Propaganda>(1928), <동의에 이르도록 하는 기술, The Engineering of Consent.(1955)등이 있다.

 

버네이스는 선전 (Propaganda)에서 '대중 심리'와 '조종'의 개념을 강조한다. 이러한 개념은 삼촌인 프로이드로부터 영향받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인데 버네이스는 프로이드를 조언자로 여겼고 자신의 위상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프로이드의 유명도를 활용하는 한편, 인간의 심리학과 동기에 관한 프로이드의 통찰력을 그의 PR캠페인을 구상 할때 이용했다. 프로이드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환자의 무의식적인 동기(motives)로 숨겨진 욕구를 밝혀내고자 했다면 반대로 버네이스는 이러한 심리적 테크닉을 <공중이 그들의 심리를 움직이고자하는 클라이언트의 영향력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계획적 전략>의 일부로서 클라이언트의 동기(motives)를 감추기 위해 이용하였다. 버네이스는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뉴욕의 할렘가에서 영업하는 한 가게를 예로 들면서 사회심리학의 PR의 응용에 대해 얘기한다. “할렘가에서 빵가게를 연 주인이 흑인점원을 고용하지않아 흑인들에게는 빵 한 덩어리도 팔지 못했으나 그후 전략을 바꿔 흑인 점원 몇 명을 채용하니 순식간에 500,000덩어리×사람이 팔렸다.”고 설명하면서 사회심리학과 마케팅의 관계를 아주 쉽게 비유하였다.

버네이스는 1923년 PR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책인 ‘여론의 구체화’ (Crystallizing Public Opinion)발간한 해에 뉴욕 대학교(New York University)에서 첫 PR 과목을 개설하여 가르치면서 많은 새로운 일들을 하였다.

 

버네이스는 1919년 뉴욕트리뷴지의 편집차장이었던 Doris Fleishman과 함께 "Edward L. Bernays, Counsel on Public Relations"라는 회사를 차렸고 922년 도리스와 결혼하여 1962년까지 뉴욕에서 PR회사를 직접운영하였으며 주요기업, 정부부처 그리고 캘빈 쿨리지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우어에 이르는 미국의 대통령들에게 상담을 해주면서 주목을 받을만한 일들을 하였다. Doris는 1925년에 미국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처녀성이 그대로 기록된 여권을 받게 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까지 저자, 강연자, PR업계사장, 비평가로써 활동한 버네이스는 2세기에 걸쳐 미국PR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에 기여한 셈이다.

 

연대기적인 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1915

디아그일레프(Diaghilev)의 러시아 발레 미국 투어

 

1917

버네이스의 브로드웨이 시절

 

1918

제1차 세계대전시 크릴(Creel) 공보위원회(CPI): 전쟁수행시 미국의 입장을 국내외에 선전하기위해 만든 조직

 

1920

전미 유색인종 진보협회(NAACP) 대회

 

1923

아이보리 비누와 예술

 

1924

협조를 통해 인정받다: 산업예술 상

 

1928

캘빈 쿨리지대통령을 “거의 웃게”(nearly laugh)하다.

 

1929

자유의 횃불

 

1929

빛의 황금축제

 

1931

급성장 사업

 

1932

제너럴 모터스: 차량 가치를 향상시켜 판매 증대

 

1934

아메리칸 토바코 사의 녹색 무도회

 

1939

필코 라디오와 텔레비전프로모션

 

1940년 대

아이디어가 무기이다

 

1941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945

전미 유색인종 진보협회(NAACP)

 

1960년대

흡연의 위험성

 

1990년대

PR 라이선스 도입 사례: 설문조사

 

그는 PR업 여명의 시대에 미국 최고의 PR인으로서 고객에게 인정받았고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가끔 비윤리적인 PR기법도 도입한 흔적이 있다. 버네이스의 그런 비윤리적인 측면을 지금 현재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 말년 PR의 윤리성 제고와 PR산업이 전문 산업 분야로 인증받는데 역점을 둔 것은 그의 그러한 과거에 대한 참회의 노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참회의 노력이 PR의 새벽을 맞이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문화역사학자인 앤 더글라스(Anne Douglas)에 의하면 "제품 판매를 위해서 혹은 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버네이스는 여론을 어떻게 움직였는 가를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그는 문화의 상업화를 총체적으로 전개한 사람(the man orchestrated the commercialization of a culture)이었다.

버네이스는 노련하게 과학적인 논리로 일반 소비자들을 움직였다. 현대 PR에서 버네이스는 논리와 실행의 관계를 명확히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후배 PR인들에게 PR이 한나라의 정치, 경제 및 문화를 주도 할 수 있는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잇는 것인지 보여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1928년 "선전(Propaganda)"에서 "대중의 의견과 고질화된 습관을 의식적으로 지능적으로 조작하는 일은 민주국가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라고 강조했다.

 

“90살이 되니 경쟁자가 줄어들어서 좋다”는 버네이스의 말에 그가 얼마나 외부와의 치열한 경쟁속에서도 새로운 아이디어개발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느낄 수 있다.

 

흔히들 Ivy Lee와 Edward Bernays를 비교하면서 Ivy Lee는 기술(art)의 사람이고 버네이스는 과학(science)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과학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고객과 소비자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MPR기법을 개발 하였으며 그 시대의 그러한 기법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PR인들에게 큰 사고(Big Think)를 통한 PR전략을 수립하여 PR시장의 영역을 더욱 넓히리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오고 있다.

 

버네이스가 기획한 “빛의 황금축제”행사는 평화시 최고의 이벤트로 기록되고 있다는 것과 같이 버네이스는 ‘PR의 황금축제’를 위해 전생애를 바쳤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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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년 05월 26일 20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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