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공보, 홍보 및 PR을 중심으로-

20여년간 PR분야에 종사하면서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는 한가지 숙제가 있다. "과연 PR과 「홍보」는 같은 개념이며, 외국 책에서 언급되는 PR을 우리말의 홍보라는 단어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겠는가?"라는 문제다.

지금까지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혼선이 일어나고 있고 또 PR은 당연히 홍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학자나 PR인들이 많이 있어 이제 이 문제를 범PR업계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 결론을 내릴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의 결론은 "PR=홍보"가 아니고 "PR>홍보"라는 생각이다.

최근 PR이 다루고 있는 분야는 아주 광범위하고 그 기능도 매우 전략적이다. 국가나 기업 또는 단체가 위기에 직면 했을때 그 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위기관리전략」, 마케팅을 활성화해서 판매를 촉진시키는 「MPR 활동」, 「변화(change)」 경영을 시도해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전략, 전쟁이 일어나 국가적 위기가 도래했을때 이에 대응하는 전략,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의 「이미지관리(Image + Management = "Imagement") 전략」의 수립

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PR의 기능이 과연 우리말의 "홍보"라는 단어로 대입될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홍보’라는 단어가 PR이 내포하고 있는 전략적인 기능을 다 함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간 "언론홍보"라는 말은 아주 구체적으로 언론매체를 통해 공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활동을 의미해왔는데 영어의 "publicity"라는 개념과 유사하게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홍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고찰이 없이 그저 막연히 「홍보=PR」 이라고 인식되어 왔는데 이 경우 PR의 기능은 언론홍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지난시절 "국가홍보"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체재유지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특수홍보」로서 항상 과장하고 필요할 경우 심지어 왜곡도 서슴치 않으면서 정부홍보를 국내외에서 수행해 왔기에 「홍보」라는 용어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그간 한국PR협회와 한국PR기업협회의 발족에 깊이 관여한바 있다. 그때 협회의 명칭을 지을때 「PR」이냐 「홍보」냐에 대해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지만 필자는 「PR」이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바 있다. 협회 명칭에 영어가 들어가 모양세가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결국 "홍보가 PR이 갖고 있는 모든 기능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한국PR협회" "한국PR기업협회"로 명칭을 확정했었다. 한국PR협회 발족 후 PR학자들이 모여 학회를 조직하였는데 학회명을"한국홍보학회"로 하였다. 최근 학회의 몇몇 학자들을 만나면 학회명이 홍보로 되어 있어 PR의 폭넓고 전략적인 기능을 커버할 수 없다고 얘기하면서 "한국PR학회"로 개명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을 들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공보수석"을 "홍보수석"으로 바꾸었다. 이 변화는 정부 PR기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정부 PR의 큰 틀이 바뀐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PR을 국민에게 일방적인 메세지를 전달하면서 주로 대언론 업무에 역점을 주는 그간의"공보" 기능에서 벗어나 국민들과 대화하는 참여 정부의 보다 넓은 개념의 "홍보"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이 새로운 기능을 "전략기획 홍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세계적인 PR학자가 제시하는 PR의 4가지 모델을 잠깐 소개하면서 공보․홍보․PR에 대한 논의를 다시하고 우리 한국적인 커뮤니케이션의 4가지 모델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루닉(J.E.Grunig)과 헌트(Todd Hunts) 교수가 "PR관리론"(Managing Public Relations)에서 제시한 PR의 네 가지 모델은; ①`1900년 이전에 시행한 언론대행술(Press Agentry/Publicity)모델 ②190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등장한 공공정보형(Public Information) ③1920년에서 1960년 사이에 실행된 쌍방 불균형(Two-way Asymmetric)모델, ④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된 형태의 쌍방균형(Two-way Symmetric) 모델이다. 

「 언론대행술(Press Agentry/Publicity Model)」 모델은 정치인들이나 저명 인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하는 모든 수단, 방법 등을 다 동원하는 모델로서 이의 특징은 윤리성이 완전히 무시되고 과장, 왜곡된 일방적 메세지만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PR인들을 "press agent"(언론대행업자)로 불렀다. 미국PR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에드워드 버네이즈(Edward Bernays: 1892-1995)는 PR인들이 "press agent(언론대행업자)"로 불리는것을 가장 싫어해서 자신을 "PR 카운셀러(counsellor)"로 소개하곤 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당시 "보스튼 대학살"이나 바눔(P. T. Barnum)의 기막한 조작 등은 언론대행술 모델에 속한다. 이는 일방향 접근 방식이다.  

공공정보형(Public Information Model) 모델 역시 일방향 접근 방식으로서 주로 정부기관에서 일방적으로 국민에게 발표하는 정책 홍보가 여기에 속한다. 20세기 초에 추문폭로(muckraking) 언론인들이 정부와 대기업을 공격한데 대한 대응책으로 공공정보형 모델이 개발되었다. 기업경영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언론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언론대행업자들의 일방적인 선전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들은 언론인들을 PR실무자로 채용, 기업 활동을 설명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토록 하였다. 이들은 기업에 관한 좋은 일만 보도자료로 내보냈지만 그들이 보낸 정보는 일반적으로 진실성있고 정확한 정보였다. 아이비 리(Ivy Lee)는 이 모델에 입각한 PR을 수립한 당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쌍방향 불균형 모델(Two-way Asymmetric Model)은 PR을 공중으로 하여금 조직의 견해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도록 이용한다. 경쟁이 심한 기업들이 이 모델을 사용한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PR실무자들은 행동과학과 사회과학을 적용하여 PR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델의 대표적 실무자는 에드워드 베네이즈로서 그가 적용한 이론은 주로 설득(persuasion)이론이였다. 베네이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선전가들의 전략에서 확인했듯이 인간을 조정 가능한 대상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간이 사악한 목적으로 조정될 수 있다면 선의의 목적으로도 조정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쌍방향 균형 모델에서 조직과 공중(公衆)은 바람직한 관계를 맺기 위해 동시에 변해야 한다. PR활동을 통해 공중들이 변화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조직도 공중 즉, 소비자의 요구에 적합하게 변화해가야 한다는 것이 그루닉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쌍방향 균형 모델은 PR업무에 있어서 상당히 높은 윤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모델은 진실을 밝히고 조직과 공중간의 상호이해를 넓히는 것이 PR의 기본 목표라는 것이다.

수년전 대한항공 여객기 괌추락 사고 당시 괌정부 당국이 괌공항은 안전하다는 일방적 메세지를 던지자 한국 언론이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후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괌정부 당국은 전문 PR대행사가 개입한 쌍방 균형(Two-way Symmetric)모델 기법을 채택하기로 결정한다. 한국 언론과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설득메시지만 전달해서는 대중적 인식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상대방을 변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도 동시에 변해야 하는, 극약처방을 추진했다. 마침내 괌 정부 산하기관인 관광청의 한국내 PR업무를 맡고 있었던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가 적극개입, 본격적인 위기관리 PR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시행함으로써 사고 초기의 부정적인 언론보도를 바로잡는 본격 작업에 돌입했다.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는 먼저 괌 주지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직접 유족을 위로하고 정부 당국자와 대한항공 관계자를 만나는 적극적인 위기관리 전략을 권장했다. 주지사 방한시 유족과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는지 등 여러가지 우려할 만한 사항들이 거론됐으나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는 괌 주지사가 방한하여 희생자들의 영령 앞에 고개숙이고 앞으로 괌정부당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상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 한국인들의 정서를 이해한 최우선의 대책임을 강조했다.

또 한국 기자들과 어울려 식사를 같이 하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이면 괌정부의 입장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고 추천하였다. 

한국기자들에게 일방적인 설득 메세지만 던지기보다는 괌측이 먼저 변하는 모습을 보이고 또 이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벌이자 언론의 보도 논조가 전과 많이 달라졌다. 지금도 기자들이 괌의 최고 당국자가 이태원에서 소주를 함께 하며 격의 없이 얘기를 나누었던 그때를 회고하며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PR전략이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실정에 맞는 한국형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없겠는가? 그간 필자는 많은 PR사례들을 접하고서 우리 나름대로의 한국형 커뮤니케이션의 4가지 모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선전 → 공보 → 홍보 → PR을 그루닉과 헌트의 4단계 모델과 결부시켜 보고자 한다. 

언론대행술 모델은 과장되고 왜곡된것이 특징이라면 정치커뮤니케이션에서 얘기하는 "선전"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선전이 바로 언론대행술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많은 우리의 정치인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정부나 의회의 주요 인사들과 기념사진 하나 찍어서 마치 미국에 가서 큰일이나 한 것처럼 왜곡 선전하는 일이 많아 이를 비난 하는 소리가 높다. 내용은 전혀 없으면서 포장만하여 국민을 오도하는 PR업무를 해왔던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였다. , 지난해 대선 당시 노무현후보의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지는않겠다"는 말이 신선한 충격을 준바있다. 알맹이도 없이 국민을 속이는 "선전"활동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된것이다. 그래서 이 첫번째 모델을 한국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선전"모델이라고 이름 붙인다. 

두번째 모델인 공공정보형 모델은 큰 의의없이 "공보"모델이라고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델은 공중에게 정보를 주는 (Public be informed) 모델이다. 정부에서 발표할 때 …는 안된다. …를 하면 어떤 벌칙을 받게 된다. 언제까지 신고해야 한다등 정부가 공중에게 일방적으로 알리는 딱딱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는 선전모델처럼 과장이나 왜곡을 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미국PR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이비 리(Ivy Lee)가 공중에게 정보를 주는 보도자료를 통하여 이 모델을 실제 많이 이용하였다. 

다음으로 공보에서 한단계 업 그레이드 된 홍보의 기능을 생각할 때 "설득"이 중심이 된 쌍

방향 불균형 모델은 "홍보"모델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무난하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상호이해와 신뢰에 바탕을 둔 쌍방향 균형모델은 가장 윤리적이고 기업이나 조직, 국가의 갈등요인들을 해소하는데 가장 적합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면서 한국적 커뮤니케이션의 모델을 선전 → 공보 → 홍보 → PR의 4단계로 요약하고자 한다.

이러한 4단계를 제시하면서 앞으로 정부의 조직 편제 개편시 "홍보수석"을 PR 혹은 커뮤니케이션 담당 수석이라는 직책으로 한단계 더 업 그레이드 시키는 작업을 통해 진정한 대국민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You Can Not Not Communicate"라는 말이 언급되었지만 "이 세상의 존재는 그 무엇이든 커뮤니케이션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단 일초라도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왕이면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것이 PR이 전략적 기능이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대표적인 이유다. 더구나 PR의 주체가 개인을 넘어 기업, 조직 및 국가에 이르게 되면 전략적 PR의 중요성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아닌가. PR은 분명 「홍보」보다 한단계 더 진화된 커뮤니케이션 모델이며, 윤리적이고 전략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4단계 모델 중 기업이나 조직, 국가가 어느 모델을 택할 것인가는 PR주체의 사업영역․PR주체가 처한 환경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감안 되어야 하며 또 복수로 모델을 채택할 수도 있다. 

 

미국 독립투쟁은 표본적인 언론대행술 모델 

PR업계에서는 미국 독립 투쟁 과정에서 핵심 브레이들이 동원한 PR전략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었으나 조작적이고 과장된 면이 많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PR의 수단과 기법을 중요한 무기로 이용한, 미국 독립을 위한 정치투쟁 전략가들은 반영(反英) 여론을 분기(奮起)시키고 미국 독립을 위한 동조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놀랄 만한 방법들을 사용했으나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는 너무나 비윤리적인 측면이 많다.

1763년부터 1783년에 이르는 20년 간의 독립투쟁에서 사무엘 애덤스(Samuel Adams)와 그의 혁명 동지들은 그들의 목적달성을 위해 여론을 성공적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는 그것은 여론의 중요성에 바탕을 둔 대중 설득원리로 발전했으며 이후 미국의 정치PR 내지 정부PR의 바탕을 마련했다.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은 반영(反英) 여론을 결집시키고 미국의 통일된 독립의지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연출된 사건이었다. 1773년 12월 6일 밤 애덤스의 선동적 연설에 사주를 받은 "자유의 아들"(Sons of Liberty)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하고 배에 올라 1만 5000파운드의 차(茶)를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으로 애던스는 반영(反英)세력의 봇물을 터뜨렸고 이는 결국 독립전쟁으로 나아가는 봉기의 기폭제가 됐던 것이다.

또 PR의 윤리적인 측면과 관련하여 많이 인용되고 있는 사건이 "보스턴 대학살"(Boston Massacre)이다. 보스턴 대학살도 애덤스가 각색한 사건(pseudo event)이었다. 1770년 3월 5일밤, 보스턴 세관 근처에서 영국의 한 초병이 미국의 독립운동 투쟁 인사들이 동원한 부두 불량배(villain)들에 의해 공격당하자 일단의 영국 정규병들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애덤스는 이 사건을 즉각 "보스턴 대학살"로 명명하고 이들 부두 불량배들은 "순교자"(martyrs)로 추켜올리면서 처참히 살해된 것으로 선동적으로 연설했으며 "가공할 대학살"(Horrid Massacre)이라고 제목을 붙인 팜플렛을 제작하여 널리 배포하여 반영(反英)감정을 자극했다.

PR에 있어서 어떤 한 사건을 어떻해 이름을 붙이는가에 따라 PR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보스턴 대학살"이라는 진실과 거리가 먼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이름을 붙이면 대중들은 쉽게 흥분하기 때문이다.

애덤스는 1748년 창간된 "인디펜던트 애드버타이저"(Independent Advertiser)지, "보스턴 가제트"(Boston Gazette) 및 기타 신문에 수백 편의 선동적인 글을 여러 가지 가명으로 기고하여 영국을 공격했다. 식민민국의 신문들은 이러한 글을 실어 반영(反英) 캠페인에 앞장서게 됐다. 애덤스와 그의 동지들은 반영(反英) 여론을 분기시키는 수단으로써 수백종의 팜플렛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혁명의 뚜렷한 문서"(distinctive literature of the revolution)라고까지 불리게 된 팜플렛은 1750년부터 1776년 400종 이상이 발행됐으며 1783년까지 1500종 이상이 됐다고 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김정기 교수는 PR의 역할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PR은 바다에서 배가 항행(航行)함에 있어 암초와 모래톱의 존재를 탐지하고 별을 읽어주는 항법사의 역할을 한다. PR은 선장의 대역은 하지 못하나 선장의 항행에 있어 필수적인 자문역으로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 애덤스는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훌륭한 자문역을 뛰어넘어 직접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계획을 짜서 미국독립운동을 위한 최고의 PR인이 됐다. 그러나 정직과 윤리적인 측면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현대 PR 관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비윤리적인 요소들이 전략과 실행 계획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프레스 에이전트의 대가 피. 티, 바눔 (P.T. Barnum)은 ‘광고의 쉐익스피어'

19세기의 신생 신문들은 광고료 결정의 근거가 되는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해 항상 독특한 기사거리를 발굴하려 애썼고, 당시의 언론대행업자(press agent)들은 이러한 신문을 선전수단으로 줄곧 활용하였다. 

19세기 프레스 에이전트 활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피. 티. 바눔(P.T. Barnum) 이다. "광고의 쉐익스피어(Shakespeare of advertising)"라고도 불리웠던 바눔은 뉴욕 시에 특이한 동․식물을 전시하는 변종 (freaks) 박물관을 소유하면서 특이한 전시를 기획했다. 다음의 몇몇 활동상에서 바눔이 사용했던 주된 기법(tool)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바눔은 퍼블리시티를 위해 자신을 허풍장이로 비난하거나 자신을 옹호하는 가공의 이름으로 서명된 거짓 편지를 편집자에 보내곤 했는데, 이 책략은 항상 성공했고, 그의 활동 기간 중 즐겨 사용되었다. 

1835년 바눔은 조이스 히스(Joice Heth) 라는 이름의 흑인 노예를 자신의 박물관에서 대중에게 소개하였다. 바눔은 이 흑인 노예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유모라고 주장했다. 히스와 관련, 바눔은 우선 뉴욕시의 한 장소에 홀을 빌려 대규모의 홍보 캠페인을 펼쳤는 데, 이때 사용했던 포스터와 광고들은 이제는 노인이 된 히스의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으며, 조지 워싱턴의 부친의 서명이 있는 히스 노예 매매 계산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히스는 조지 워싱턴의 어린 시절에 관한 그럴듯한 일화를 이야기 했으며, 이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켜 이 소식은 수 주간 뉴욕 지역의 여러 신문에 실렸다. 

한편, 히스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람객 수가 줄어 들자, 바눔은 한 지역 신문사의 편집장에게 조이스가 가짜라는 내용의 익명의 편지를 보냈다. 한 편지에서 바눔은 히스가 조종이 가능한 자동인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은 바눔이 의도한 대로 다시 많은 관람객을 불러오기에 이르렀다. 

이름을 개명하고, 거짓 배경을 날조하는 것은 프레스 에이전트들의 전통적 수법이었다. 5세 왜소증 환자를 발견했을 때, 바눔은 동화 속의 주인공을 연상하여 이 아이를 "엄지손가락 톰(Tom Thumb)"이라 이름 붙였고, 극적효과를 높이기 위해 실제보다 6세가 많은 11세 아이로 소개하면서 인상적인 가계 내력을 만들어 냈다. 

"엄지손가락 톰"을 알리기 위해 바눔은 모든 광고/선전 수단과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했다. "엄지손가락 톰"은 곧 국제적으로 유명해졌고 바눔은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엄지손가락 톰"의 첫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는 발표에 세계는 다시 한번 흥분했으며, 그와 그의 부인 라비니아(Lavinia)가 아기를 팔에 안고 있는 사진이 도처의 신문들에 실렸다. "엄지손가락 톰"의 첫 번째 아기 또한 날조된 것이며, 이를 통해 바눔은 그의 박물관에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다.

날조된 체포 및 소송 사건 또한 당시 많은 프레스 에이전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었다. 

턱수염이 난 조세핀 클로풀리아 부인(Madame Josephine Clofullia)을 그의 변종 박물관에서 대중들에게 소개할 당시, 초기 반응이 신통치 않자 바눔은 사람을 사서 클로풀리아 부인이 실제로는 남자라고 경찰에 고발토록 했다. 이후 클로폴리아 부인이 경찰에 체포되고 후에 무죄방면되자, 이 소식은 많은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바눔이 1870년 대에 뒤늦게 시작한 그의 전설적인 서커스 공연의 언론홍보에서도 그의 기법들을 엿볼 수 있다.  

초기 서커스 관련 프레스 에이전트들은 공연단 보다 먼저 공연장소에 도착하여 퍼블리시티 활동을 펼쳤다. 

바눔의 서커스단은 독립된 광고/선전 부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3단계로 공연장소에 도착, 활동을 펼쳤다. 1차 팀은 눈에 띄는 모든 장소에 포스터를 부착했다. 약 1주일 후에 도착한 2차 팀은 잔여 광고물을 부착하고, 공연 전 관련 기사 게재를 유도하기 위해 기자들을 만났다. 끝으로 3차 팀은 신문들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는지를 점검하고, 마을의 지도급 인사들과 만나며, 서커스단이 퍼레이드를 펼칠 코스를 점검했다. 퍼레이드는 대중을 모으기 위한 가장 정교한 수단이며, 바눔은 자신이 제공하는 볼거리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얘기하도록 하기 위한 수많은 계획들을 만들어내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위와 같은 자신의 퍼블리시티 활동과 관련, 바룸은 공공연히 "언론을 통해 대중을 우롱했음"을 자랑했고, 이러한 그의 속임수와 언론 조종은 그 당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신문들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깜짝쇼(stunt)의 대가 짐 모란 (Jim Moran) 

1937년부터 1985년까지 활약했던 짐 모란(Jim Moran)은 가장 뛰어난 publicity stuntster (이목을 끄는 행위를 함으로써 언론보도를 유도하는 사람) 로 평가된다. 당시의 신문과 텔레비전들은 지속적으로 모란의 스턴트 소식을 다루었다. 

1930년대 초 항공사를 공동소유하고 있었던 모란은 이 회사의 언론홍보를 위해 부활절 기간 중 백악관 상공을 비행하며 토끼를 낙하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수년 후 모란은 센트럴 파크에서 연을 이용하여 3명의 왜소증 환자를 공중에 띄우려 시도하다가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각 연에는 모란의 고객 제품들의 광고가 인쇄되어 있었고, 모란의 좌절된 계획에 대한 언론 보도로 인해 모란은 언론노출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란은 남들이 자신을 고용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아이디어를 갖고서 그것을 적용할 고객을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다른 프레스 에이전트와는 달랐다. 흔히 그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실행함으로써 고객은 물론 자기 자신에 관한 퍼블리시티를 얻을 수 있었다.  

모란이 큰 성공을 거둔 최초의 깜짝쇼는 알래스카에서 에스키모인에게 아이스박스를 판매한 것이다. 겨울 코트를 입고 유콘 지역으로 향했던 모란은 마침내 아이스박스를 구매하려는 찰리라는 에스키모 인을 찾을 수 있었고, 성대한 의식을 거쳐 아이스박스가 전달되었다. 알래스카에서의 아이스박스 판매 소식은 세계를 즐겁게 했으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란은 헐리우드로 가서 하얀 눈에 의해 눈이 먼 벼룩 몇 마리를 패러마운트 사에 팔았고, 100파운드의 빙하를 전시에 사용하려는 상인들에게 팔 수 있었다. 

모란은 영화 "The Mouse That Roared" 의 퍼블리시티를 위해, 군인복장을 하고서는 그 영화상에 등장하는 가공의 공작령인 Grand Fenwick의 대사로서 포즈를 취했다. 모란은 또한 워싱턴 D.C.에 공식적인 Grand Fenwick 대사관을 설치하고, 본넷을 은제 쥐로 장식한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서 외교관 파티에 등장했다. 워싱턴에서 2주를 보내고서, 곧 개봉할 영화의 시사회에 초대되었던 500여 명의 사람들에게 성대한 무도회를 개최함으로써 모란의 영화 "The Mouse That Roared" 퍼블리시티 활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모란은 상식을 뛰어넘는 스턴트의 대가였다. 1940년대 초, 모란은 당대의 저명한 오케스트라 단장이며 자신의 라디오 쇼를 진행하고 있던 프렛 워링 (Fred Waring)에게 고용되어 있었다. 워링과 그의 아나운서인 폴 더글라스(Paul Douglas) 간에는 해묵은 논쟁이 있었는 데, 그것은 캘리포니아의 햇빛이 과연 플로리다의 햇빛보다 낫냐는 것이었다. 모란은 과학적으로 이에 대한 해답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신체의 반만을 가리는 의상을 디자인하여 신체의 한 면만을 일광욕하면서 플로리다에서 한 주를 보냈다. 다음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신체의 다른 한 면을 일광욕했다. 그리고 나서 그을린 정도를 비교했다. 캘리포니아 및 플로리다의 주 관광성들은 열심히 이 실험을 쫓아다녔고 모란은 현명하게도 무승부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워링은 두개 주 해변에서 열리는 초청 공연들에서 계속적으로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모란은 속담으로부터 stunt의 영감을 얻기도 했다.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 중, 민주당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강을 건너는 도중에는 말을 갈아타서는 안 된다고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이에 공화당은 모란을 고용, 그 반대의 경우를 입증해 보이도록 요청했다. 모란은 리노(Reno)로 가서 트러키(Truckee) 강에서 민첩하게 말을 바꿔 타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말을 바꿔 타는 모란의 언론 보도 사진은 지지당을 바꾸도록 유권자들을 설득하기에는 충분치 않았고 큰 격차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재선되었다. 

모란의 프레스 에이전트로서의 활동 기간 중, 기자들은 그가 단지 깜짝쇼를 펼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취재를 하러 가곤 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대단한 이야기거리를 얻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비판적인 사회학자들은 PR인들이 이러한 깜짝쑈를 뒤에서 조정했다고 해서 PR인들은 “돈받는 거짓말쟁이”(paid liar)로 비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란의 이러한 익살스러운 몸짓은 당시 싹트고 있던 진지한 PR 카운슬링에 의해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시간이 더할수록 진지한 PR 카운슬링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커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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